산책로 생기며 사라질 위기... 한 주민의 민원에서 시작
신사우동 주민자치회·문화예술전문가·행정 협업사업으로
이야기 수집·표지판·비석·조형물 설치 등

옛 ‘우두배터’를 기억하는가? 

어르신 세대를 제외하고 시민 대부분이 모를, ‘우두배터’는 고려시대에는 우두사(牛頭寺)를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날랐고, 조선시대부터는 우두와 하일리를 잇던 교통수단이었다.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주민들이 천렵을 즐기던 곳이었다. 

옛 우두 배터를 설명하는 표지판과 마지막 뱃사공 이범용(83) 선생의 필체를 새긴 비석

춘천은 댐 건설로 의암호가 생기기 전까지 백사장을 즐기는 강변 문화가 있었다. 뱃터는 댐이 생긴 후에도 많은 이들의 생업을 이어주는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다리가 생기고 교통이 발달하며 뱃터와 배는 희미한 옛 추억이 됐다. 최근에는 춘천시의 산책로 조성사업으로 인해 남아있는 ‘우두배터’의 흔적조차 사라질 위기에 놓였었다. 하지만 한 주민의 민원으로 시작, 신사우동 주민자치회·신사우동·(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춘천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가 힘을 모아 ‘우두배터’ 장소성을 되살린 뜻깊은 일이 벌어졌다. 

약 7개월 전, 주민 홍원구 씨는 ‘우두배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우두상리 4길 호숫가에 산책로 조성사업으로 ‘우두배터’의 흔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마을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보전해야 한다며 신사우동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어 신영길 신사우동 주민자치회장도 뜻을 모아 문화도시 사업 중 춘천문화재단과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의 협업사업인 ‘당근책’에 ‘옛 우두배터 장소적 재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공모했다. 

‘당근책’은 ‘시민 당사자성에 근거한 문제 해결책’의 줄임말로서,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가 진행하는 주민총회에서 마을 의제로 최종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마을에서 꼭 해결되어야 한다고 판단된 의제를 다시 발굴, 주민들과 문화예술전문가, 행정이 거버넌스를 구성하여 함께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문화도시 사업이다.

춘천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는 지난 4~5월에 ‘당근책’ 참여 마을 공모를 진행, 심사를 통해 신사우동의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이후 사업은 신사우동 주민자치회 주관으로 10여 회에 걸친 회의를 통해 의제에 대한 해결 및 실행방안을 모색했다.

프로젝트는 주민과 춘천의 문화예술전문가가 협업하여 문화예술관점으로 진행됐다. 한주석 작가는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우두배터’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를 바탕으로 ‘우두배터’ 표지판을 제작·설치했다. 이야기는 곧 전자책으로 만들어지고 문화도시 사업 SNS와 노션페이지(turnchuncheon.or.kr) 등에 업로드된다. 시각예술단체 ‘예술밭사이로’는 ‘우두배터’에 상징 조형물을 제작·설치했다. 특히 마지막 뱃사공 이범용(83) 선생의 필체를 아로새긴 비석도 세워져 사라질뻔한 ‘우두배터’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장소성을 복원했다.

옛 우두 배터가 있던 곳에서 ‘우두 배터 천렵’이 열리며 이날을 축하했다.
 

이를 기념하는 ‘우두배터 천렵’이 지난 8일 옛 ‘우두배터’가 있던 바로 옆 우두상리 4길 38에서 열렸다.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이수자 소지영과 고수 임동호가 판소리 〈사철가〉 공연으로 막을 연 행사는 ‘옛 우두배터를 기억하는 우두상리 주민들의 이야기 한마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우두배터’와 강변의 생활문화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과 신사우동 주민자치회·(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춘천문화재단·신사우동 관계자 등 많은 이들이 모여 축하했다.

당근책 시민연구자로 활동한 신사우동 주민자치회 김정기 위원은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노고가 있었다. 현수막을 내걸어 어르신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모았다. 옛 사진을 구하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차금석 통장님이 어렵게 사진을 구해와 정말 기뻤다. 뱃터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단합해서 즐겁게 살아가고 여러 관혼상제를 함께 치른 옛 시절이 생생하게 담겼다. 

사진은 계속 모으고 있다. 종이배를 닮은 조형물은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어린 세대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희망을 담았다”라고 말했다. 

옛 우두 배터 자리에 세워진 조형물

그는 이어서 “우두 마을의 문화는 강과 뗄 수 없다. 뱃터를 추억하는 어르신들은 풀로 덮여있고 낚시꾼들만 오가는 우리 동네 고유 문화자원을 어떻게 살릴지 몰랐는데 여기까지 왔다. 여러 제약으로 온전히 복원하지 못한 점, 여전히 산책로 난간이 마을과 호수를 가로막고 있는 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우두배터’의 장소성을 되살린 점이 정말 뜻깊다”라고 말했다. 또 “우두는 예부터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소양강이 설악산에서부터 이리로 오고 북한강이 금강산에서부터 오며 모든 물자와 정보가 집합했던 곳이다. 강은 우두의 문화와 삶의 근원이었다. 지역을 알아야 지역이 알려지고 지역을 사랑할 수 있다. 그게 자치의 출발점이다. 지식의 근본은 동네를 아는 거다. 이 동네의 이야기를 저기 보이는 아파트의 새로운 주민들에게도 알려서 이 마을에서 행복하게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도록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

신영길 신사우동 주민자치회장은 “땔감을 구하러, 농사를 지으러, 장례를 치르러 배를 타고 하일로 건너갔다. 뱃터가 사라지며 이야기도 묻혔다. 이제 다시 지역의 고유한 이야기를 되살리는 첫걸음이 시작됐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가 복원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 윤요왕 센터장은 “예산의 한계로 탈락된 마을 의제 중 주민들이 꼭 바라는 의제를 지역의 거버넌스를 통해 실현했다. 협업의 성공 사례이다. 앞으로도 주민자치회와 마을을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춘천문화재단 강승진 문화도시센터장은 “지역의 문제는 당사자인 주민이 주축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 주민의 주도하에 예술가·활동가·행정·재단·마자센터까지 하나가 되어 진행했기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 이번 성과가 제2의 ‘우두배터’ 사업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우두 주민들이 상여를 싣고 하일로 건너가는 옛 사진

이번 프로젝트가 단지 옛 ‘우두배터’의 장소적 복원에서 멈추면 안된다. ‘우두배터’ 인근 옛 빨래터도 복원해야 하고 나아가 춘천 곳곳에 산재한 강변 문화의 역사·흔적·기억을 다양한 방식으로 복원하여 현대적 요소로 재생산, 시민의 현재 삶과 잇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춘천의 문화적 원형과 자원을 제대로 살려내어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길이다.

 

“언젠가 다시 배가 다니면 참 좋겠어”

‘우두배터’ 마지막 뱃사공 이범용(83)

뱃사공은 언제 시작했나요?

이야기가 좀 길어. 내가 팔 남매 중 맏이고 우두 토박이야. 아버지가 마흔여덟에 돌아가셔서 내가 동생들이랑 어머니까지 여덟 식구를 먹여 살렸지. 서른한 살 먹도록 장가도 못 가고 일만 했어. 가진 거 하나 없고 딸린 식구들 많은 데 누가 시집을 오겠어. 먹고살려고 안 해본 일이 없어. 그러다 나랑 같이 보따리 장사하던 사람이 나를 좋게 봐서 자기 조카딸을 소개해줬어. “동생들도 많이 자랐고 앞으로 형편이 좀 나아질 거 아니냐. 너라고 평생 없이 살겠냐”라면서 말이야. 그렇게 열 한 살 차이 나는 아내를 얻었어. 

마지막 뱃사공 이범용(83) 선생이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안사람까지 아홉 식구 먹이고 입히려고 물불 안 가리고 일했지. 보수가 적은 일은 안 하고 힘들어도 돈 많이 주는 일을 했어. 그래야 식구들 죽 한 그릇이라도 먹일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배를 보기 시작한 거야. 78년인가 79년인가 시작해서 2년 동안 배를 봤지. 배 보는 일도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고 동네에 살아야만 지원할 수 있었어. 배 보는 사람은 둘이 필요한데 서너 명이 지원하면 제비뽑기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함명보라는 이웃이랑 배를 보게 됐어. 일은 교대로 돌면서 했지. 

뱃터는 어떻게 운영했나요?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아 일고여덟 마지기 정도 땅을 샀어. 거기서 농사지어서 배도 짓고 수선도 하고 배 보는 사람 보수도 줬지. 땅을 살 때 돈을 보탠 사람들은 배 회원이라고 해서 배를 그냥 탔어. 돈을 보태지 못한 사람들은 일 년에 쌀 한 말씩 내고 탔지.

뱃사공 보수는 일 년에 쌀 열 가마니였어. 당시에 일거리가 없으니 쌀 열 가마니는 큰 벌이였지. 그 당시 일 좀 잘한다는 사람은 하루 쌀 다섯 되 벌었고 보통은 석 되, 넉 되 벌었어. 배를 보다 마을 반장이 됐는데 쌀 서 말을 더 받게 되어 좋았지.

주민들이 뱃터를 많이 이용했나요?

배 없이는 살 수 없었어. 연탄도 귀해서 틈만 나면 강 건너 하일로 나무를 하러 갔지. 그래야 밥도 짓고 겨울도 나지. 또 농사지으러 오가고, 사람이 죽으면 건너에 산이 있으니까 상여 싣고 사람 가득 태우고 건너가고. 그렇게 온 동네 사람들 다 태워줬어.

강 건너 하일 사람들도 많이 탔어. 거기 애들이 학교에 가려면 우두상리 쪽으로 와야 해. 배 안 타면 후평동으로 봉의산 밑으로 소양 1교 건너 학교 가야 하니까 멀지. 해 넘어가면 깡패들이 무서워서 그리로 갈 수도 없어. 시내 갈 때도 빙 돌아 걸어가면 힘드니까 배를 타고 건너와서 버스를 탔지. 배를 안 타려야 안 탈 수가 없었어. 하일 사람들 뱃삯은 일 년에 한 번씩 하일로 가서 집마다 추렴했어. 쌀을 한 말씩 받아. 돈으로 낼 사람은 돈으로 받고. 낯선 사람이 배를 타면 지금 돈으로 한 천원 정도 받았지. 

뱃터도 장날처럼 대목이 있었나요? 

그때 하일 양지쪽으로 솔밭이 있어서 거기로 소풍 많이 갔었어. 학생이고 어른이고 시내 사람들이 소풍 마치면 다들 배를 탔어. 수지맞는 날이지. 제일 수지맞을 때는 명절이야. 사람들이 모두 고향에 오고 하일 쪽으로 성묘도 하러 가니 하루에 지금 돈으로 몇십만 원 벌었지. 또 사초나 벌초 때도 괜찮았어. 가족들이 일꾼들 데리고 들어가는 거야. 우두 사람들은 그냥 가도 일꾼들 태우는 삯은 따로 받았지. 그리고 하일은 고구마가 유명해서 시내 장사하는 사람들이 리어카에다 고구마를 가득 싣고 건널 때 따로 가격을 정해서 사람보다 더 받았지. 

재밌는 일도 있었겠어요?

귀신이 있다는 말도 있었어. 나보다 먼저 배를 본 사람이 그러더라고 밤에 건너편에서 배 건너 달라고 소리 질러서 가보면 아무도 없다는 거야. 그때 건너편 민가가 꽤 깊이 있었거든. 아무튼, 밤에 배 건너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게 제일 무서워. 비까지 내리면 정말 소름 끼쳐.

왜 더 오래 일하지 않았나요?

2년이면 많이 한 거야. 서른 명 정도 타는 배였는데, 사람이 많으면 더 탄단 말이야. 위험하니 내리라고 해도 안 내려요. 어떻게 해 그냥 줄을 당기는 거야. 그러면 배가 가라앉아서 힘이 더 들어. 장마질 때도 밭에 가야 한다고 하고, 태풍이 와도 밭을 단속해야 하니 건너 달라 하고. 위험한 일이 많지. 한창나이였으니 힘든 걸 모르고 했지만, 보통은 배 보는 일 1년 하면 힘들어서 더는 못해. 그래서 1년 일하면 마을에서 뱃사공한테 일을 더 할지 말지 물어봐. 

뱃터에 발길이 끊긴 건 언제부터였나요?

정확히 언제라기보다는 다리가 생기고 도로가 좋아지고 차가 늘면서 줄기 시작한 거지. 언젠가 누가 마을에서 배를 사서 직접 운영하기도 했어. 하지만 잘 안돼서 어느 날 배만 두고 사라졌어. 내가 우리 동네에서 배 보는 마지막 사람이 됐어. 사람들이 이제라도 다시 기억해주니 기뻐. 언젠가 다시 배가 다니면 참 좋겠어.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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