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서예가였던 아버지가 쓰신 <매기독닥>(제주방언: 아무것도 없다는 뜻)을 다시 찾아본다. 글씨에서 사람이 살아 오지는 못하지만, 그가 남긴 글씨로 위안을 얻는다. 얼마 전 개나리미술관에서는 광주 조정태 작가의 초대전이 있었다. 그는 특정한 사람이 아닌, 역사 속에 사라져 간 이들을 무수한 별들로 애도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광주항쟁을 겪은 그는 띠를 두른 활동가였다. 우러러 하늘을 올려다보는 깊은 슬픔과 애도의 그림은 그 어떤 투쟁과 발언보다 힘이 있다. 

예술은 죽음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가장 오래된 그림인 라스코 동굴벽화는 죽은 동물에 대한 애도의 흔적들임을 알 수 있다. 상징주의 화가 뭉크의 그림 속 음울한 정서는 유년시절 겪어야 했던 어머니와 동생들의 죽음에서 기인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보다 가족의 죽음을 고통스러워한다. 나이 든 부모의 부음보다 삶을 가로지르는 비탄에 빠지는 슬픔은 자식의 죽음이다. 2014년 이후, 2022년 10월, 또다시 젊은 영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제 막 꽃 핀 청춘의 죽음보다 애달픈 사연이 있을까. 

독일의 미술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는 남은 평생 아들의 죽음을 그렸던 작가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둘째 아들을 잃고, 2차 세계대전에서 손자를 잃었다. 작가는 아들의 슬픔에서 출발하여 민중들의 어머니가 되고, 거친 목판화로 반전운동의 불을 지폈다. 

콜비츠의 1932년 작품 <비통한 부모>는 부부의 모습을 조각한 목판화이다. 끌 등으로 나무를 깎아 표현한 판화는 그 거칠고 투박함 속에서 더욱 배가된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서로 부둥켜안은 채 얼굴을 파묻고 일체가 된 두 사람은 마치 바위가 되어버린 사람과 같다. 케테 콜비츠는 이 판화를 조각으로 제작하여, 아들이 있는 묘지에 세워두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 수많은 콜비츠의 자화상들은 자식을 잃은 깊은 슬픔을 상기시킨다. 아들을 잃은 고통은 끝없는 어둠과 같았다고 한 작가의 말처럼, 커다란 손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려 어둠 속으로 들어간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게 한다.

수많은 죽음들과 그에 대한 애도의 예술은 슬픔을 더 나아가게 하며, 공감하게 하며, 우리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애도의 예술에는 힘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끝이 아닌 영원(예술)으로 데려다주므로…….

정현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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