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천 기자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이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혹은 민주화운동의 격렬한 시위 장면이나, 태극기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단어와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단어는 ‘새’라는 생각이 든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새, 아득한 공간을 건너뛰는 새, 그래서 옛사람들은 새가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훨훨 날아가는 새의 이미지처럼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자유는,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없는 듯하다. 항상 무언가의 제약이 있는 한정적인 자유만 주어진다. 그리고 이 불완전한 자유를 더듬어보면 두 종류의 자유가 있다고 짐작된다.

첫째는 야생의 자유다. 우리에서 풀려난 야생 동물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구 달려가는 듯한 무경계의 자유. 하지만 야생 동물이 과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야생 동물은 어디서 어떤 천적이 튀어나올지 몰라 늘 초조한 마음이다. 물 한 모금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다. 눈은 늘 전방을 주시하고 귀는 쫑긋 세워야 한다. 느긋하게 여유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최상위 포식자뿐이다. 그러니 야생의 삶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두 번째의 자유는 키즈카페의 자유다. 키즈카페는 야생과 가장 반대인 공간이다. 2중, 3중으로 안전장치를 걸어두고 CCTV를 통해 항시 아이들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실은 키즈카페라는 공간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은 그래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다. 구르고 싶은 데로 구르고 놀고 싶은 데로 놀면 된다. 몇 가지 규칙만 잘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야생과는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자유 중 어떤 자유를 원하는지는 다르다. 스스로 최상위 포식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전자를 원할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니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가 어떤 자유를 지지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전자의 자유를 지지한다면 정부가 무정부 상태를 원한다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가능한 위험이 예상되는 모든 곳을 키즈카페처럼 안전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김성회 전 대통령실 비서관이 이태원 참사 직후 페이스북에 “국가도 무한책임이지만 개인도 무한책임”이라는 글을 썼다. 이태원에 간 것은 개인의 자유였으니 개인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다. 인터넷에서도 그런 의견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첫째 개인의 자유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희생으로 이미 치렀다. 거기에 무슨 책임이 더 필요할까. 둘째 지금 발생한 문제는 키즈카페에서 아이들이 다친 문제와 같다. 규칙에서 벗어나 비상식적인 놀이를 하다가 발생한 사고라면 아이로서도 부모로서도 별로 할 말이 없지만, 특별한 규칙 위반 없이 평소대로 놀았는데 큰 사고가 났다면 책임은 키즈카페에서 져야 하지 않을까? 입만 열면 자유를 35번씩 외치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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