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방문객).

평소 시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눈과 귀를 사로잡거나 혹은 마음으로 접하고 되뇌었을 시구(詩句)이다. 오랜 세월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해온 정현종 작가의 시다. 정 시인은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첫 시집 《사물의 꿈》(1972)부터 반세기 동안 쉼 없이 창작활동을 이어왔다.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만해문예대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 여러 시집과 《고통의 축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 문학 선집 《거지와 광인》, 산문집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날아라 버스야》 등이 있다.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한 탁월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칠레 정부가 파블로 네루다 전문가에게 수여하는 ‘네루달 메달’을 받았으며,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김유정 문학촌 개관 20주년 ‘대한민국 문인 아카이브’ 사업으로 전석순 작가(김유정 문학촌 멘토 작가)와 기자는 정현종 시인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현종 시인

Q. 최근 신작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가 나왔습니다. 반세기 동안 시를 써오며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무언가요? 또 오랜 창작의 원동력은 무언가요?

내 시가 초기에는 난해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나중엔 그런 소리가 사라진 걸 보면, 세월과 함께 사람이 변하면서 시도 어느 정도 변한 것 같습니다. 사람도 시도 자연스러운 쪽으로 변화해 온 탓이겠죠. 변화라면 그 정도 일 겁니다. 

변하지 않는 어떤 철칙은 없어요. 그저 그때그때 쓰는 거지요. 원동력이라면 내가 사는 세계 또는 상황에 대해 시의적절하게 때로는 아주 강렬하게 반응하고 표현을 해온 것뿐입니다. 이는 모든 예술가가 마찬가지일 겁니다.

Q. 어린 시절에도 문학적인 면모가 돋보였나요? 아니면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나요?

그 시절은 나라도 국민도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출판문화도 열악하고 책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러니 별로 읽은 것도 없었죠.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어린 시절이 시의 운명 혹은 시의 질을 결정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꼭 시뿐만은 아닐 겁니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어린 시절은 존재의 샘’이라 그랬듯이 글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일생에서 어린 시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공평하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이 각자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2015)에 〈샘을 기리는 노래〉라는 작품이 있어요. 어린 시절이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그야말로 집약해서 얘기한 시입니다. 시골에서 살았다면 산골짜기에서 샘이 솟는 걸 봤을 겁니다. 그걸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은 큰 차이가 있어요. 솟아나는 샘을 어린 시절에 보고는 시인이 되어 기억에서 끄집어냈습니다. 눈으로 본 그 샘물이 마음을 샘솟게 한다고 썼어요. 이렇듯 어린 시절의 체험은 정말 중요합니다.

Q. 습작기에 큰 영향을 받거나 시를 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 있나요?

글쎄요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고등학교 때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겸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책을 참 좋게 읽었어요. 성인이 되어서는 니체를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미국에 일이 있어 다녀올 때는 니체의 영역본을 많이 가져와 읽었죠.

Q. 전자책, 오디오북, 유튜브 등 시를 쓰고 접하는 방식이 크게 변했습니다. 작가님도 읽고 쓰는 방식에 변화가 있나요?

그런 기기를 이용해서 읽은 적도 없고 또 읽지도 못합니다. 문학·철학 등은 책으로 읽어야 합니다. 활자를 읽으면서 꿈을 꾼다고 하지요? 하지만 전자매체를 통해서는 안 될 겁니다. 책이라는 종이 공간과 전자 기기의 공간은 아주 다릅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책을 활자로 읽고 육필로 써야 합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백지에다 연필로 써요. 

젊은 세대는 그런 것에 익숙한데 그것이 작품을 상당히 다르게 만드는 듯합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의 시를 보면 AI가 쓴 듯한 게 많아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수 없지만, 문인은 활자의 공간을 통해서 문학을 해야 합니다.

Q. 번역한 시 중 스페인어권 시가 인상적입니다. 작가님께 스페인어권 시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예전에는 영미권 시인을 주로 번역했었죠. 그러다 스페인어권 시인들을 알고 나서는 영미권 시들이 재미없어졌어요. 파블로 네루다(1904~1973),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 등을 번역했는데 그들 모두 정말 좋아서 번역했습니다. 영미권 시는 뭔가 얽매인 듯하고 대학에서 공부한 흔적이 역력해요. 그게 식상해졌어요. 그런데 중년 이후에 발견한 스페인어권 시는 상상력이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이며 자연에 가까웠어요. 왠지 혈육 같았습니다. (웃음) 마침내 다른 나라 시에서 혈육 같은 시를 발견한 거죠. 그래서 번역을 하게 됐어요.

Q.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특히 중요하게 가르친 건 무언가요?

제자가 생긴다는 건 아주 큰 행복입니다. 순전히 저 생활비 벌려고만 한다면 그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웃음)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한 게 있어요. 시집 《세상의 나무들》(2001)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스페인어권의 대시인 옥타비오 파스(1914~1998)가 한 말이에요. 시 쓰고 싶은 사람들이 새겨야 할 그런 문장인데 한 번 읽어볼게요.

“가짜 시인은 거의 언제나 타자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진짜 시인은 자기 자신한테 말할 때도 타자와 이야기한다.” 난 이게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인용도 하고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내 안에서 익고 곰삭아서 나오는 게 제일입니다. 시는 특히 그래요. 산문은 의식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어요. 하지만 시는 무의식의 언어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겪은 걸 써야 해요. 겪어서 살과 피가 되고 자연스럽게 육화돼서 나와야 합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머리 굴려서 쓰는 것이 참 많아요. 내가 두뇌적인 시라고 부르는데 그런 거를 아주 싫어해요.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겁니다. 머리 굴려서 그럴싸하게 써놓으면 사람들이 잠깐 재미를 느끼겠지만 결코 오래 가지 않죠. 

Q. 시를 쓰고 싶은 청소년들은 무엇을 유념해야 할까요?

우선 좋은 작품을 읽어야 해요. 뻔한 답이지만 정말 중요합니다. 한국의 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시들 그야말로 고전이 된 시들, 또 시뿐만 아니라 철학·종교 등 많이 읽을수록 좋아요. 그러면서 열심히 살아가면서 겪고 또 그동안 읽은 게 바탕이 되고 그러면서 육화되는 거죠. 그러면 어느 날 팍 터질는지 모르죠. (웃음)

Q. 인터뷰 준비할 때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참사 속에서 문학의 역할은 무언가요? 

마음 아픈 일입니다. 유사 이래 수많은 참사가 있었어요. 특히 인류의 가장 큰 참사는 전쟁입니다. 그에 대한 반응을 문인들이 해왔습니다. 어떤 글을 쓰도록 추동을 한다면 그냥 쓰면 됩니다. 머리로 써서 감동이 없는 글이 아니라 가슴과 온몸으로 쓰는 겁니다. 

Q.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가 있을까요?

〈이슬〉이라는 시를 읽어줄게요. 

강물을 보세요 우리들의 피를/ 바람을 보세요 우리의 숨결을/ 흙을 보세요 우리들의 살을./ 구름을 보세요 우리의 철학을/ 나무를 보세요 우리들의 시를/ 새들을 보세요 우리들의 꿈을./ 아, 곤충들을 보세요 우리의 외로움을/ 지평선을 보세요 우리의 그리움을/ 꽃들의 삼미(三昧)를 우리의 기쁨을./ 어디로 가시나요 누구의 몸 속으로/ 가슴도 두근두근 누구의 숨 속으로/ 열리네 저 길, 저 길의 무한 ―/ 나무는 구름을 낳고 구름은/ 강물을 낳고 강물은 새들을 낳고/ 새들은 바람을 낳고 바람은/ 나무를 낳고……/ 열리네 서늘하고 푸른 그 길/ 취하네 어지럽네 그 길의 휘몰이/ 그 숨길 그 물길 한 줄기 혈관……/ 그 길 크나큰 거미줄/ 거기 열매 열은 한 방울 이슬 ―/ (진공(眞空)이 묘유(妙有)로 가네)/ 태양을 삼킨 이슬 만유(萬有)의/ 바람이 굴려 만든 이슬 만유의/ 번개를 구워먹은 이슬 만유의/ 한 방울로 모인 만유의 즙 ―/ 천둥과 잠을 자 천둥을 밴/ 이슬, 해왕성 명왕성의 거울/ 이슬, 벌레들의 내장을 지나 새들의/ 목소리에 굴러 마침내/ 풀잎에 맺힌 이슬……//

Q. 어떤 순간이 가장 기쁘셨고 또 어떤 순간이 가장 힘드셨나요.

글을 써오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나는 시를 흥이 나야 씁니다. 속에서 무언가 고양되어야 시가 나옵니다. 그래야 시를 쓸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시가 잘 나오면 즐겁습니다.

Q. 이번에 시집이 7년 만에 나왔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언가요?

계획은 없어요. 시는 계획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웃음)

정리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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