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건, 다니카와 타로(글), 오카모토 요시로(그림)

좀처럼 긴 글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읽는 것이 힘들다. 지금은 긴 대답이 아니라 질문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해야 하며 무겁게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 춘천에는 은행나무 길이 곳곳에 있다. 사철의 은행나무가 모두 아름답지만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에 쨍한 가을 햇살이 비칠 때면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행복감에 취하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은행나무 잎들이 샛노랗게 물들어 눈이 부시던 하루 10월 29일, 밤, 158명의 젊은이들이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날 이후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면 울컥 눈물부터 난다. 내 마음이 이런데 유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 참사로 자식을, 형제와 자매를, 연인을, 친구를 잃은 이들의 슬픔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분들이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슬픔을 충분히 애도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억울함에 억울함이 더해지지 않도록, 정부와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참사 24일 만에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선 유족들은 피 끓는 심정으로 여전히 묻고 있었다. 그 빛나는 아까운 청춘들이 왜 길 위에서 죽어가야만 했는가? 그 시간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가? 왜 모두가 함께 슬퍼하고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는가?       

현대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데 큰 몫을 하는 게슈탈트 심리 이론에는 ‘전경’과 ‘배경’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전경’은 어느 한순간 관심의 초점이 되는 부분, 대상을 인식할 때 관심의 초점이 되는 부분이다. ‘배경’은 관심 밖으로 물러나는 부분, 관심 밖에 놓여 있는 부분을 말한다. 건강한 개체는 매 순간 자신에게 중요한 게슈탈트(Gestalt: 모양, 형태, 전체 등의 뜻을 지닌 독일어 명사. 넓은 의미로 지각된 유기체의 욕구나 감정을 뜻하기도 함.)를 선명하고 강하게 형성하여 전경으로 떠올릴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개체는 전경을 배경으로부터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전경으로 떠올려 집중하고, 충분히 감각하고,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 시간인가? 한국 사회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흐지부지 배경 속으로 흘려보낼 일이 아니다. 이 참사에 대해 충분히 감각하고, 알아차리고,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으로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어제의 감정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오늘을 살기란 어렵다. 10. 29의 진실, 고통과 아픔이 충분히 해소되고 다뤄지지 않은 채 유족들이, 또 우리가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기란 어렵다. 

부디 유족들의 질문에 정부와 우리 사회가 제대로 답하고 책임지기 바란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애도하고, 그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었던 일상의 따뜻함만을 간직한 채 다시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간절히 소망하며 그림책 『살아 있다는 건』을 추천한다.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 ‘살다’를 오카모토 요시로가 그림으로 펼쳐 낸 그림책이다. 담백하게 그려진 일상의 장면들 속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게 만든다. 

김정은(남춘천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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