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 내린 때아닌 비와 함께 첫 한파 특보가 내려진 날, 이 시대의 마지막 아나키스트, 우리나라 농촌·농민운동의 선구자, 시민·사회운동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박승한 선생님이 하늘의 부름에 응답을 하셨다. 엊그제 선생님을 찾아뵙자는 대화를 나누었던 뒤였고, 지난 연초에 요양원에 들어가신다는 소식에 서운함을 느껴오던 터라 갑작스런 부음은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지난해 7월 박열 열사 기념관과 김문자 여사(가네꼬후미코)묘가 있는 문경을 한번 다녀왔으면 하시던 말씀에 응답하지 못한 것이 큰 짐으로 남게 되었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98세의 일기를 지내셨으니 무엇이 더 아쉬울 것이냐고, 인생 100년은 아무리 길어봐야 찰나와 같다고도 한다. 그러니 망백(望百)을 사나 백수(百壽)를 사나 미련은 남을 수밖에 없다. 백수에 이르렀다는 선생님의 부음이 가슴을 찌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선생님이 살아오신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마지막 증언이 사라졌다는 의미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과 선생님이 살아오신 표상을 이제는 더 이상 새겨갈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박승한 선생님은 춘천지역의 큰 어른신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큰 어르신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춘천지역에서 어르신으로 제대로 대접받은 적도 없다. 이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로잡을 수조차 없는 일이기에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선생님의 일대기는 그 흔한 파란만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 선생님의 출생연도는 주민등록상으로 1928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925년이다. 그러니 우리 나이로 올해가 98세시다. 일제강점기 말에 침략자 일본이 싫어 몽골을 가려고 가출해 서울로 상경했다가 돌아와 징용에 끌려가셨다. 원래는 일본으로 끌려가실 것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원산 부근의 비행장에서 비행기 수리작업을 하다가 해방되기 전 기적처럼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해방과 함께 강원도청의 임시직으로 근무하다가 뒤늦게 고등교육을 마쳤고, 한국전쟁 이후에야 대학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과 진학 과정은 지면으로는 풀 수 없다. 대학 진학 후 아나키즘에 심취한 선생님은 이정규, 정화암 선생 등 우리나라 1세대 아나키즘 운동가들과 연을 맺고 있다. 박열 열사의 부인 김문자 여사의 묘비에 새겨진 1세대 아나키스트 30여 명 중 마지막까지 생존해 계셨던 유일한 분이다. 

대학 졸업 후 교편을 잡았지만, 아나키즘 운동의 영향으로 많은 핍박을 받으셨다. 첫 발령지였던 서울 청운중학교, 춘성중학교를 거쳐 원주 대성고등학교에 부임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시기이다. 대성고등학교로 부임한 것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 시기는 선생님의 아나키즘 경도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또한 이 시기 선생님의 발자취에는 농촌·농민운동, 시민·사회운동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정규 박사가 주도하여 우리나라 사회단체 제1호로 설립된 ‘국민문화연구소’의 창립회원이기도 하다. 1973년 설립된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들어서는 군사독재의 핍박에 미국이민까지 실행하셨다. 미국에서 귀국 후에는 1993년 10월에 창립한 춘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공동대표로 시민운동의 버팀목이 되셨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선생님의 발자취는 크게 남아 있다. 2010년 설립된 춘천역사문화연구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시며 2013년에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강원도세요람·춘천풍토기』 번역작업에 매진하셨다. 『강원도세요람·춘천풍토기』는 2016년 출판되어 역사학도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2017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생산 공문서』 번역발간과 일제강점기 철원수리조합 관련 문서 번역에도 매진하시어 지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셨다.  

故박승한 선생님

선생님의 일생은 해방 전후사와 한국전쟁기의 격동기에서 경자유전의 원칙을 지키고자 상속받은 전·답 중 일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한 일, 국민문화연구소, 농촌지도자협의회,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등의 정의사회구현운동, 80년대 이후의 민족문제연구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역사문화연구 시민운동 등의 버팀목으로 살아오신 지역 선배이며 원로의 표상이다. 선생님의 일생은 가족과 자녀들에게는 존경받기 힘든 세월이었다. 선생께서는 당신의 문집 『北漢江』에서 이런 소회를 밝히신 바 있다. “60~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교사직에서도 퇴출당하여 자녀 교육비, 생활비까지도 농지를 팔아 충당하였고, 정의사회구현운동을 위해 많은 토지를 팔아 충당하면서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줄 것이 없는 점”을 애석해하셨다.

기후위기라는 말이 일상화되어가는 시기에 1974년 6월 「통신」 제9호에 기고하셨던 선생님의 글은 다시금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浪費(낭비)의 죄’라고 쓰신 글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지구, 수십억 년을 간직해온 자원, 영원히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원을 어쩌자고 20세기를 사는 사람이 마구 파헤쳐 낭비해 버릴 수 있느냐”고 질책하셨다. “낭비의 죄를 가장 많이 지은 사람들은 백인들”이라는 선생님의 지적은 현대에 이르러 기후위기의 주범이 선진공업국이었다는 점과 궤를 같이한다. 선생님은 “노자가 말하기를 법은 많이 만들수록 범죄는 많아진다 했다”며 “이 원리는 자연재해에도 적용되는 듯하다”고 하셨다. 무분별한 종자 수입에 대한 지적에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선생님은 우리나라와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많이 기고하셨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 집중화의 문제를 지적하는 ‘서울 유감’은 1980년 7월 「통신」 제18호에 실렸는데 혜안과 문제 진단에 격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지역 언론에도 많은 기고를 통해 지역 문제를 지적하신 바 있다. ‘춘천과 소양강’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고언을 1986년 4월 강원일보에 기고하였고, ‘개발과 홍수의 피해’에 대해 2003년 3월 강원도민일보에 기고하셨고, ‘의암댐의 부당성’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셨다. 선생님은 노년에 이르러 지방정치에 대해서 늘 안타까움을 표명하셨다. ‘지방의 야권후보 단일화’, ‘한국 정치의 전환기’라는 기고는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가슴에 새겨야 할 고견이다. 2015년 9월 6일 선생님의 한옥이 전소되는 화재는 선생님의 일생의 기록 상당수가 사라지는 아픔이었다. 그 어떤 핍박보다도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우리나라 성씨의 계보를 정리하고 계셨는데 화재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선생님의 가옥 화재는 춘천지역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기록이 사라진 가슴 아픈 사건이다. 큰 화재에서도 선비의 풍모를 잃지 않으셨다는 주변인들의 말은 선생님의 풍모를 대변한다.

아직도 선생님이 할 일이 많이 있고,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욕심은 선생님의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했다. 스승으로 선배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선생님을 이제는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 이제는 선생님을 놓아드려야 한다. 질곡의 역사에서 사과와 보상도 없이 지나버린 핍박의 감옥에서 선생님을 해방시켜드려야 한다. 미련을 쉽게 떨어내지 못하는 후배로서 선생님의 일생에 생채기를 더하는 글 몇 줄로 선생님을 추모하는 핑계를 삼으려니 낯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다. 늘 동지라고 불러 주셨던 선생님의 영정 앞에 용서를 구할 뿐이다. 

오동철(춘천시민사회단체네트워크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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