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궁(名弓)

잡목 숲은 무덤처럼

어둠의 둘레를 무지개로 감고

별빛을 모아 물결의 장단에 따라

바람이 하늘거렸다,

날새의 제일 유심히 반짝이는

두 눈깔을 꿰뚫음에

공명(共鳴)하며 하룻밤을 흔들린 이의

사무치는 뜬 눈의 웃음

드넓고 광포해라,

새가 온 들을 채어 쥐고

한 기운으로 푸드드득 오를 때

활짝 당겨 개이는 먼오금

숲과 들을 벗어나 휘달려

그는 죽음의 사랑에 접근한다.

윤후명 시집 <명궁> 중에서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리라. 첫 부분은 ~하늘거렸다. 이고, 둘째는 ~~드넓고 광포하라, 가 나머지가 세 번째이리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가 있다. ‘날새’라는 단어다. 그냥 새도 아니고 ‘날새’다. 왜 날새일까? 그런 새가 있나? 없다. 그러면 나는 새라는 의미인가? 세 번째 부분을 보면 푸드득 오를 때라는 구절을 보아 나는 새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짐작해보자, 제목이 명궁이니 사수가 활을 개이고 한 순간을 기다린다. 날아오르는 새를 기다리는 것인가? 그럴 것이다. 사수는 명궁이기 때문이다. 그냥 나무에 앉은 새를 쏘지는 않을 것이다. 첫 부분은 과녁에 대한 묘사처럼 보인다. 과녁을 오래도록 응시하면 그리 보일 수 있겠다. 물론 실제의 숲일 수도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부분이다. 날새도 그렇거니와 ‘공명’은 누구와의 공명일까? 숲과의 공명일까? 사수와 새의 공명일까? 뭔가 통했다는 것인데, 하룻밤을 흔들린 이가 누굴까? 마지막 부분에 의하면 사랑하는 이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녁의 대상은 단순히 새가 아닐 수 있다. 잔뜩 개인 화살은 사랑하는 이에게 던지는, 쏘아붙이는 한마디 말일지 모른다. 상대를 향해 잔뜩 화살을 개이고 부들부들 떨면서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이는 광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뜬 눈의 웃음은 비웃음인가? 

마지막 부분의 죽음의 사랑도 모호하다. 죽음에 이르는 사랑인가? 사랑해서 죽인다는 것인가? 과녁 안에 포착되는 때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죽음을 좌우할 것이다. 하여간 사수는 자신이 활시위를 당긴 행위로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상대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접근한다. 대저 우리의 사랑이 그런가? 광기의 사랑이라면 모르겠다. 

두 개의 쉼표와 한 개의 마침표로 보아 세 번째 부분을 먼저 이해하고 앞의 두 부분을 읽어야 할 수 있다. 그리 읽으면 연시로 읽을 수 있겠다. 연인의 두 눈을 꿰뚫어 공명했다는 것이 이해된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 앞에 약자가 되기에 광포하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활시위를 활짝 당긴 것처럼 연인 사이의 긴장이 팽팽하다, 긴장을 잃으면 새는 영영 날아갈 것이기에. 어찌 읽더라도 명징하게 의미가 다가오지는 않는다. 채워 넣어야 할 상상이 많다.

한승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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