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운순(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인제로 가는 출장 중이었다. 주유도 할 겸 들른 휴게소에서 ‘톡’을 확인했다. 

-네이버에서 네 시를 찾아서 읽었다. 다 좋았다.-

얼마 전 현업에서 퇴직한 큰오빠다. 오빠의 좋았다는 문장에 마음이 쓰여 한참 동안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오빠는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다. 노동현장에 있었지만, 책을 놓지 않았다. 함께 보내던 사춘기 시절 오빠의 방에는 늘 방바닥부터 천정까지 책이 쌓여 있었다. 정작 시를 쓸 사람은 오빠였다는 부채감에 나는 출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시골에서 천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오빠는 내가 1학년에서 2학년을 올라갈 즈음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월반을 했다. 학교에서 나는 내 이름 대신 누구 동생으로 불렸다. 훗날 불온한 가족사로 인해 군 복무를 마친 오빠가 학교 대신 밥벌이를 선택했을 때도 나는 그가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그 비슷한 근처에서 살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때였을까 늦은 시간 골목을 들어서다 오빠의 모습을 본 적 있다. 대문의 초인종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오빠, 스스로 고단한 가장의 짐을 지고 가던 그의 등이 너무 미안하여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가부장의 어원은 ‘아버지의 지배(rule of fathers)다. 유일한 대표 남성이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전체를 지배하면서, 생계를 책임지는 것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학년을 월반할 정도로 영민하던 한 사람을 밥벌이의 지옥에 가둔 것도 말하자면 ‘아버지의 지배(rule of fathers), 가부장 문화였다. 단, 오빠는 지배보다는 의무를 더욱 많이 실천한 사람이었다. 군을 막 제대한 그에게 가족을 지배할 권력이라도 있었을까. 

노르웨이의 홀터(Holter) 박사는 한 연구 자료에서 가부장제가 소멸하는 유럽의 성평등 나라에 사는 남성이 그렇지 않은 나라의 남성보다 2배 정도 행복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1980년대 가부장의 문화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우리 가족은 오빠를 제외하고 누구도 노동생산성 안에 진입할 수 없었고, 생산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결정권도 없었다. 영민하던 오빠를 꿈 대신 생계부양자로 밀어 넣는 결정은 그 스스로도 비켜 갈 수 없는 한 나라의 오래된 문화였다.

이제 세상은 조금씩 ‘아버지가 지배(rule of fathers)하는 가부장제의 소멸로 진입하고 있다. 기꺼운 일이다. 가부장제의 소멸은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밥벌이의 소명 안으로 밀어 넣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빠가 아직 시인이나 소설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묻지 못한다. 대신 가부장제의 소멸이 다가오는 이즈음 오빠가 이제라도 그의 잊은 꿈 안으로 불쑥 다가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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