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나는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들판을 가지게 되겠지

풀이 마르는 냄새가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스밀 거야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냄새야

당신은 트레일러에서 빛을 끄고 녹슬어가다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연장으로 태어날 거야

당신은 끽끽거리는 트레일러를 흔들며 요리를 하고

고장난 줄도 모르는 나를 오전 내내 수리해

나는 차돌 같은 당신의 희고 큰 치아 밑에서

펴지고 잘라지고 조여지면서 점점 쓸모 있어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독초와 뱀과 바위가 많았으면 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좋아

그런 곳일수록 진귀한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하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 좋아하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망쳐버리기 일쑤니까

나는 매일 저녁 심장을 갈가리 찢는 노을을 구경하고

밤이면 부엉이 눈 밑에서 당신을 소재로 시를 쓸 거야

어느 날 혼자 보는 별이 더 아름답다 생각되면

내 부츠를 풀밭에 던져

돌이 별이 될 만큼 멀리 떠나가 줄게

김개미 시집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중에서

소망이 담긴 이 시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시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좋다. 소박하지만 인간의 심장을 잘 보존하고 있다. 좋은 시는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시를 쓰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여야 하는가? 어떤 사랑은 좋아하는 사람을 망친다. 관계 속에 예속되고 그것으로 불행해지기도 한다. 다만 저만큼 떨어져서 봐야 아름답다. 망가져서 들판에 녹슬어 가는 트레일러는 어째서 아름다움을 생산하는가? 돌과 별도 나와 아스라해서 아름답다. 

한승태(시인)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