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묵(출판기획 형) 조합원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지난 연말까지 정신없이 지내다 이제야 숨을 좀 쉬네요. 저희 업종이 주로 공공기관을 상대하다 보니 특성이 그래요. 연말까지 온갖 보고서들을 만들어야 하고 행사도 많고. 해마다 11월부터는 연차 쓰기도 어려워요. 특히 12월에는 휴일도 없고 하루에 4~5시간 자면서 일해요. 직원이 일곱인데 정말 고맙죠.

춘천에 동종 업체가 많나요?

한 150곳 정도 될 거예요. 그중 1인 업체가 한 7~80곳으로 절반을 차지하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곳은 약 20곳 정도로 추산합니다. 시장이 작으니 대부분이 영세해요. 춘천에서는 웬만한 일감은 죄다 서울 을지로로 보내요. 우리도 그렇고 작업 물량을 100% 소화하는 데는 없어요. 을지로 업체에 파일만 보내면 책으로 다 만들어서 상자에 담아 보내주니까 효율적이죠. 한때 컬러 인쇄기를 살까 고민했었는데 시장은 작은데 너무 비싸서 답이 안 나와요.

《춘천사람들》 조합원은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됐나요?

중앙의 언론환경이 완전히 기울어졌으니 지역신문만이라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하면서 당시 운동의 중심지였던 《옥천신문》 답사도 다녀오고, ‘조선일보 반대 춘천 시민 모임’도 창립하고 한림대 정연구 교수님을 초빙해서 강의도 들었죠. 그러다 2009년에 《강원희망신문》이 만들어질 때 독자로 시작, 《춘천사람들》로 거듭나며 조합원이 됐습니다.

최근에 《춘천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진보적인 색채가 많이 희미해졌어요. 2020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식민지역사 박물관에서 조선과 동아일보의 일제하 부역 행위를 고발하는 기획전, ‘일제 부역 언론의 민낯’을 열었어요. 그때 춘천지역 고교 연합동아리 ‘날갯짓’ 학생들과 보고 춘천에서도 기획전을 하면 좋겠다 싶어 돌아오자마자 《춘천사람들》에 제안했는데 부담스러운지 안 하더라고요. 정말 아쉬웠어요. 《춘천사람들》에 신경 좀 많이 써야 했는데 살기 바쁘다 보니 안타까워하고만 있습니다.

편집국이 변하려고 다양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합원 데이트’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건 좋은 것 같아요. 다만 ‘조합원 데이트’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영역에서 진보적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소개하며 《춘천사람들》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역사에 관심이 큰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초등생 때부터 국사와 국어를 정말 좋아했어요. 또 아버님 영향으로 신문 보는 걸 좋아해서 웬만한 한문은 다 읽을 줄 알았어요. 지금 알고 있는 국사 지식의 70%를 그때 다 익혔어요. 고교 시절에는 형님의 영향으로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을 접했는데 진짜 재밌더라고요. 특히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읽고 억장이 무너졌어요. 좋아하고 줄줄이 외웠던 시가 죄다 친일파들이 쓴 거라니. 휴~ 해방된 나라에서 학생들에게 친일파들의 작품을 가르치는 게 말이 됩니까? 그때서부터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또 하나, 우리 아버님은 30년 넘는 긴 세월을 매일 12~18시간을 일하셨는데 왜 우리 집은 가난한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런 걸 통해서 한국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구나. 우리가 자랑하는 산업화와 고도성장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인 것을 알고는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거죠. 

그런 계기로 나중에 뭐 전공할 거냐고 물으면 무조건 사학과라고 했어요. 하지만 서울 소재 모 대학의 사학과에 원서를 넣었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철학과에 들어갔어요. 하하. 대학에서 시위에도 나서고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돌아서 형님의 권유를 받아 다시 한림대 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게 1985년이었어요.

 춘천은 어떤 이미지였나요?

충북 진천이 고향이고 영등포에서 살다가 한림대 사학과에 합격하고는 바로 휴학하고 병역을 마친 후에야 26살 1987년에 춘천에 처음 왔어요. 그전에는 강원도 전체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춘천에 오니 조용하고 깨끗해서 참 좋았어요. 서울 집에 갈 때도 예전 비둘기호나 통일호 열차 제일 뒤 칸에서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보면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러다 서울에 도착하면 숨이 막히고 답답했죠.

근데 살다 보니까 춘천의 단점과 한계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살기 좋은 도시인 건 맞는데 돈만 있으면 그렇다는 거죠. 얼마 없는 기업체의 정규직과 공무원, 교사 말고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기가 쉽지 않으니까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떠나는 현실이 안타깝더라고요. 

그런데 왜 춘천에 정착하셨죠?

제가 올해 정부 방침대로 하면 59살인데, 하하. 지금까지 지역 운동권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들 거의 다 서울로 갔어요. 춘천은 누가 지키나 의무감 같은 것도 좀 있었고 지역에서 할 만한 운동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 걱정했으면 서울로 갔을 겁니다.

인쇄업도 운동의 연장선으로 창업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 졸업하고 94년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면서 당시 ‘춘천민주청년회’에서 상근하면서 호구지책으로 승합차로 학생들을 학원과 집으로 태우는 일을 했는데, 벌이가 너무 안 좋아서 더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99년도에 작은 재단기, 복사기, 컴퓨터 각각 하나씩 장만해서, 봉의산 바로 아래 유봉여고와 한림대 후문 앞 건물 귀퉁이에 복사 가게를 차린 게 첫 시작이었어요. 그저 호구지책이었어요.

그런데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인쇄업이 운동할 때 필요한 건 다 만들어 내니 좋더라고요. 하하. 몇 해 전 김진태 선거운동원이 세월호 현수막을 훼손했을 때 자정이 다되어 그 사람을 잡아서 경찰에 고발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아침에 배포할 기자회견문을 써서 수백 장을 복사하고 현수막과 피켓을 만드는 것까지 원스톱으로 다 되는 거예요. 하하.

졸업 후 지금까지 어떤 활동에 참여했나요?

‘춘천민주청년회’를 거쳐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었어요. 주로 통일운동을 많이 해왔고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투쟁’, 2008년 ‘광우병 투쟁’, ‘박근혜 퇴진 투쟁’ 등에도 참여해왔습니다. 광우병 투쟁 때는 당원들과 두 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촛불을 들었고, 캠프페이지 반환 운동을 할 때는 매일 미군 부대 앞에 가서 시위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몰라요.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하하.

지금은 진보당의 ‘평생 당원’으로 몸담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당직 선거를 통해 위원장직을 내려놨어요. 춘천에 진보당 당원이 꽤 많이 늘어서 이제 한 150명 정도 됩니다. 이제 평생 당원으로서 당원 200명을 돌파하는 데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춘천 고교 연합동아리 ‘날갯짓’도 돕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춘천의 고교생들이 모여 소녀상을 세우고 일본 정부를 규탄하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죠. 2017년도에 소녀상 만들 때 춘천의 학생들도 함께하면 좋겠다 싶어서 고등학교 학생회장단 연합이 회의할 때 찾아가 얘기를 했었죠. 한 5월쯤에 만났는데 보름 후에 연락이 왔어요. “우리가 할게요.” 이름도 ‘날갯짓’이라 직접 짓고, 자기들 나름대로 회칙도 만들고 학교별로 회원도 모집하고 총회도 열었어요.

아이들이 참 열심히 해오고 있어요. 역사기행 같은 걸 하면 홍보부터 모집까지 스스로 다 해내요. 졸업생 중에는 근현대사 역사동아리 ‘대학생 날갯짓’을 만들었어요. 세월호 7주기에 안산에 다녀오거나, 광주 5.18 답사 등 역사기행을 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현 정부 하는 짓 좀 보세요. 2024년 교과서부터 적용될 개정 교육과정에 광주 민주화운동, 일본군 위안부 등 죄다 뺐어요.

정권이 바뀌며 그간 잠잠했던 지역의 운동권에 변화가 있나요?

전에는 ‘민주주의와 민생, 사회 공공성 실현을 위한 춘천 공동행동’, ‘춘천시민행동’ 등 다양한 활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거나 흐트러졌죠. 춘천의 연대체를 새롭게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전 문재인 정부 때만 해도 시민단체들이 절실함을 못 느꼈는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같이 뭔가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어요. 밑바닥에서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어떻게 메시지를 전할 건가요? 

대통령 부부의 ‘뻘짓’만 부각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활동은 한계가 있어요. 노동 개혁, 검찰 공화국 등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걸 명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어쨌든 적극적으로 준비해서 올 하반기에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농이나 민주노총 등 각 단위사업장에서도 투쟁을 위해 바닥 조직을 탄탄하게 다지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반성할 점도 있어요. 그간 현장 노동자와 농민을 만나지 않고 뭐 투쟁이 있을 때 문자만 보내는 등 대중들과 괴리가 컸습니다. 흔히 말하는 운동권들이 많이 반성할 지점이죠.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또 자기 몫을 내놓고 움직여야 연대가 될 겁니다. 예전에 ‘박근혜 퇴진 춘천 행동’이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참여 단체나 정당이 각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커요. 단결을 위해 철저하게 퇴진 행동 피켓만 들었어요. 그렇게 뭉칠 수 있는 지점들을 계속 모아야 합니다. 

《춘천사람들》같은 지역신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광범위한 시민의 입맛에 맞추면 죽도 밥도 안돼요. 《춘천사람들》의 철학과 가치, 나아갈 방향 등을 딱 정하고 그에 맞춰서 기사를 발굴해야 합니다. 물론 반대하는 조합원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춘천사람들》이 지역의 논란에 대해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처세만 하는 정치인처럼 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춘천사람들》의 가치는 무언가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진보에요. 처음엔 진보적 위치에 있던 조합이 시간이 흘러 중간으로 와 있는데, 중간을 다 맞추면 스텝이 꼬입니다. 그러기에는 현재 한국 현실이 너무 엄혹해요. 

데이트를 마치며 가벼운 질문 하나, 조합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나 영화를 꼽는다면? 

최근에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앉은 자리에서 두어 시간 만에 다 읽었어요. 빨치산의 딸로 힘들게 살아온 딸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렸는데 무거운 주제를 웃기고 울리며 따뜻하게 그렸습니다.

박종일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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