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천 기자

버려지는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한 시민들의 활동을 찾아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더는 아니다. 말만이 아니라 개개인이 확실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 어떤 불편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 말이다.

그렇다면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을 때의 불편은 어느 정도일까? 이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회용품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비닐봉투, 종이컵, 나무젓가락, 일회용 그릇, 쿠킹호일, 이쑤시개, 마스크 등등. 이들 중 몇 개만 없어져도 대다수는 금세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럭저럭 적응해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요즘에는 마트에 갈 때 장바구니를 챙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현대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회용품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화장지’이다.

기사를 준비하면서 ‘화장지’가 없던 시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뒤처리(?)를 했는지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흥미진진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왕이나 일부 지체 높은 양반은 무명천이나 비단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일회용품이 아닌 다회용품이었다. 이들은 천으로 처리를 한 다음 빨아서 다시 사용했다.

일부 부유층은 물로 닦아내기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북수간’이라는 이름의 공간으로서, 몸의 앞쪽은 양기가 있는 남쪽, 몸의 뒤쪽은 음기가 있는 북쪽을 상징하기 때문에, ‘북수’란 ‘뒷물’이라는 뜻이 된다.

사정이 괜찮은 일반 백성의 경우에는 측목(廁木)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나무 따위를 가공해 만든 도구로 긁어내는 도구였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이마저도 구하기 어려워 납작한 조약돌로 큰 건을 처리하고 작은 건은 볏짚을 이용해 닦아냈다. 새끼줄을 이용해 문질러 닦기도 했고, 뒷간 앞에 몽둥이를 세워두었다가 몽둥이로 닦기도 했다. 18세기 호박이 들어오고 나서는 부드럽고 넓적한 호박잎이 애용돼 식용뿐만 아니라 위생용품으로서의 범용성을 뽐내기도 했다. 이 밖의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교적 어린아이들의 경우 똥개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어렸을 때의 경험을 되살려 보자면, 특히 겨울철에는 보온 효과로 인해 더욱 유용했던 기억이 난다.

조선 정조시대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는 ‘서울에는 오줌을 날마다 뜰이나 거리에 내다 버리므로 우물물들이 모두 짜게 됐고, 냇다리의 석축 가에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는 편이다’라고 서술돼 있다. 또 19세기 말 영국 외교관인 칼스가 출간한 ‘조선풍물지’에는 ‘서울 시내를 꿰뚫어 흐르는 작은 냇물 위의 다리를 건널 때, 우리는 많은 아낙네들이 옷을 빨면서 방망이로 두드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물이 느리게 흐르는 데다 바닥에는 똥 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물을 길어다가 집에서도 쓴다’고 쓰여있다. 서양이라고 해서 더 나은 편도 아니었다. 루이 14세가 파리의 루브르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가 루브르 궁전이 오물로 뒤덮여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현재의 시각에서 이런 사실들을 떠올려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냥 웃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춘천에서 있었던 어느 강연의 내용에 의하면 현재 지구에서 사는 인구가 지속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인도 수준의 생활을 영위해야 겨우 가능하다고 한다. 즉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지금 형태의 문명화(?)된 삶을 영위하려면 지구 몇 개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솔직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볼 차례다. 지속가능한 춘천을 위해 화장지를 포기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정말 화장지를 쓰지 말고 자연인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는 아니다. 일회용품을 정말 획기적으로 줄이려면 그 정도의 ‘대단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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