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원 조합원 (사무기기 종합서비스)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많이 바쁘신가요? 

요즘은 한동안 이제 우리 딸 돌잔치 때문에 바빴고, 또 육아하느라 바쁘죠. 퇴근하면 집에서 애들을 돌보느라고 정신없어요. 그리고 한동안은 체중 관리를 위해서 꽤 노력했었는데, 조금 뺐다가 지금은 좀 주춤하고 있는 상태예요. 발을 좀 다쳐서요.

혹시 일하시다가 다치셨나요? 

아니요. 통풍이 좀 왔어요. 뚱뚱하면 온다 그러더라고요. 하하. 또 몸무게가 있다 보니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제가 1975년생인데 젊어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남들이 무릎보호대하고 다닐 때, 난 안 하고도 괜찮아서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한번 무릎이 많이 부었었어요.

체중 관리가 조금은 필요하겠네요. 지금 다니고 계신 회사의 이름이 뭐죠?

‘춘천종합OA’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사업은 아니고 직원으로 있어요. 사무기기에 대한 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복사기를 대여하기도 하고 컴퓨터를 수리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일이 어떤가요?

원래는 지금이 성수기에요. 2~3월 학기 초에 컴퓨터도 많이 사고, 장비도 준비해 놓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찾는 사람이 아예 없어요. 

왜죠? 

경기침체의 여파도 있을 거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요즘 다들 인터넷 구매를 많이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특히 당근마켓이 무섭게 컸어요. 사무실에서 필요한 기기도 직접 사고파는 환경이 갖춰지다 보니 업체를 통하는 경우가 줄어든 거죠. 사무기기 사업은 사실 건설업이 호황일 때 같이 잘 돼요. 건설사에서 장기적으로 사무기기를 대여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희 경우에는 예전에 열병합발전소를 지을 때 괜찮았죠. 지금은 많이 힘들죠. 동종 업계 계시는 분들이 아마 다 쉽지 않으실 거예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요즘 컴퓨터가 좋아져서 쉽게 안 바꾸세요. 한 번 사 놓으면 업그레이드만 조금 하면서 사용하면 10년까지도 쓰니까요. 특히 SSD(반도체 기반 저장장치)가 보급되면서부터 수명이 더 길어졌어요.

사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설치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지 않아요?

요즘에는 사람들이 별로 겁내지 않아요. 유튜브에 다 있잖아요. 유튜브를 보면서 따라 해요. OS(운영체제)가 설치된 제품을 사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거든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쉽지 않아요. 이게 초기자본금이 꽤 필요한 일이거든요. 게다가 인맥도 필요해요. 관공서에 들어가려고 해도 2천만 원 이하는 수의계약이라 담당자 재량이거든요. 춘천에서는 특정 고등학교 출신끼리 끌어주는 게 있죠. 다른 학교 출신이 들어가서 뭘 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동안 비슷한 일을 해왔나요?

처음에는 작은 회사에 있다가, 나중에 서울 마포구에 본사가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갔어요. 저는 춘천지사에서 일했고요. 근영전자통신이라는 회사였는데 주로 군부대 통신망 유지보수를 하는 회사였는데 육해공 3군 모두 들어갈 만큼 규모가 있는 회사였어요. 그러다가 체신부, 지금은 우체국이지만 여기에 잘못 뛰어들었다가 문을 닫았죠. 계속 비슷한 계통에서 일을 해왔다고 해야겠네요.

전자, 통신 분야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요?

소양고등학교 전자과를 나왔어요. 90년대만 해도 전자 분야가 유망 직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쪽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학과에 들어갔죠. 그쪽으로 대학을 가야 하는데 그때 어머니가 좀 아프셔서 대학을 못 갔어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아프시니까 제가 군대도 상근예비역을 받았어요. 동생이 둘이 있어서 제가 돌봐야 했거든요. 그렇게 이쪽 일에 뛰어들었다가 아까 말한 근영전자통신이 망하면서 쉬게 됐죠.

쉬는 동안 뭐 하셨나요?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 보러 다녔어요. 그때가 2002년 월드컵 때거든요. 전국의 경기장을 다 돌아다녔어요. 당시에 제가 강원도 응원단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지금은 그때처럼 축구보러 못 다니죠. 가정이 있으니까요.

참, 지난 일요일에 둘째 돌잔치였죠?

네. 100명이 넘는 손님이 오셔서 축하해 줬어요. 첫째는 아들이고 4살, 둘째는 딸입니다. 첫째는 코로나 시국이어서 아쉽게도 돌잔치를 못 했지요. 

100명이나 오셨다니 덕을 많이 쌓으셨네요.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저는 재혼을 했어요. 둘 다 국제결혼이고요. 첫 번째는 캄보디아 사람이었는데 국제 중매를 통해 만났어요. 그렇게 한 2년 살다가 알고 보니 본국에 따로 사람이 있더라고요. 아이도 갖고 싶은데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고요. 그래서 헤어지고 혼자 있는데 아는 분이 국제결혼을 위해서 베트남으로 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행 겸해서 같이 따라갔다가 만났어요. 국제결혼을 위해 호찌민에 와 있던 사람이었는데 첫눈에 마음에 들어서 대화할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원래 제가 긴 생머리를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돼서 대화를 나눠봤는데 사람이 너무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바로 결혼하기로 했죠.

처가에서 환영해 줬나요?

아니에요. 처음 보는 외국인이랑 결혼한다니까 장인어른은 러닝셔츠 바람으로 달려왔어요. 뜯어말리려고요. 하하하. 아내가 살던 동네까지 가서 쫓겨났죠. 그렇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몇 개월간 헤어져 있었어요. 그러다가 코로나 터지기 직전에 베트남에 들어가 장인어른의 허락을 받았어요. 허락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코로나가 터진 거예요. 제가 베트남에 가지도 못하고 아내가 한국에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베트남에서 첫째 애까지 생겼어요.

네? 그럼 생이별을 하신 거네요?

그렇죠. 첫째가 2020년 10월에 태어나서 2021년 6월에 들어왔으니까 한국 나이로는 2살이 돼서 만난 거죠. 영상으로만 보다가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속으로 울었죠. 그렇게 다시 만나서 둘째 낳고 살고 있어요. 장인어른, 장모님도 한국에 계시고요. 한국 날씨가 추워서 처음에는 조금 힘드셨지만 이제 잘 적응하셔서 아이들과 공원에도 자주 가세요.

다문화센터 지원은 잘 되나요?

아뇨. 옛날에는 많았다는데 요즘은 많이 없어요. 한동안 다문화가정에 지원이 너무 많지 않냐는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인지 많이 축소됐다고 하더라고요. 원체 민원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센터에서도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고요.

아내분은 혹시 아이를 키워놓고 사회활동을 할 계획이신가요?

그러고 싶어 해요. 워낙 활발한 성격이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거든요. 베트남에서 오신 여성분들이 쇼핑몰을 통해서 한국 제품을 소규모로 많이 수출해요. 화장품이나, 건강식품 등이요. 특히 한국산 홍삼이 인기가 너무 많아요. 예전에 장모님께 선물로 현금 30만 원 하고 8만 원짜리 홍삼을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난 홍삼이면 됐다. 30만 원은 너 도로 가져가라’면서 돌려주시더라고요. 하하하.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베트남식인가요? 한식인가요?

아직 아내가 한식에 익숙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주로 저는 한식을 만들고 아내는 베트남식을 만들어서 함께 식탁에 올리는 경우가 많죠. 베트남 음식 중에는 짜조를 자주 만들어주고 저도 좋아해요. 라이스 페이퍼에 돼지고기나 새우, 게살 등을 여러 가지 채소를 넣어 돌돌 말아 튀긴 베트남식 만두에요. 근데 아내가 맛있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장모님이 와서 해주신 걸 먹어보니 훨씬 맛있어요. 

언어는 어떤가요? 한국어에 익숙해지셨나요?

아직 서툴러요. 집으로 한국어 선생님이 오셨었는데 첫째가 크면서 너무 방해를 해요. 그래서 지금은 혼자서 공부하고 있어요. 조만간 다시 집으로 올 계획입니다. 신기한 건 첫째가 아직 한국말도 베트남말도 잘하지 못하는데 영어를 해요. 즐겨보는 ‘빌리 아저씨’라는 교육 만화가 있는데 그것만 보더니 요즘은 영어가 아니면 잘 안 보더라고요.

《춘천사람들》과는 언제부터 함께 하신 건가요?

처음부터 함께 했어요. 원래 춘천시민연대에 먼저 가입이 돼 있었어요. 원래는 사회활동에 큰 관심은 없었는데 ‘나꼼수’를 듣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겪으면서 관심이 많아졌죠. 그러다가 유성철 형이 시민연대에 있을 때 들어가게 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시민연대 사람들과 등산을 함께 가게 됐는데 울산 바위에 올라가다가 전흥우 형이 얘기한 거예요. 이러이러한 걸 지금 계획하고 있는데,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때 할 테니까 같이 해 보자. 그래서 처음부터 조합원으로 가입했죠.

개인적으로 지역 언론의 변화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한 얘기로 저는 《춘천사람들》이 생길 때 기대했던 것들이 있었어요. 요즘 신문 내용이 좀 보편적이잖아요. 일상생활에 대한 내용들이 주로 많죠. 초기에는 우리만의 탐사보도를 발굴하려고 했죠. 근데 상황을 제가 이렇게 보니까 아, 그렇게 하기에는 여건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인력이나 시간, 자본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초창기에는 각자가 기자가 되자는 분위기도 있고, 한때는 제게도 써보라고 했었죠. 

춘천 어딘가에는 누군가 아파하는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죠. 법원 앞에 누가 피켓 들고 서 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근데 요즘 기사 내용은 아픔보다는 이제 희망이나 즐거움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읽다 보면 심심할 때가 솔직히 있어요. 어쨌든 이 신문이 도태되지 않고 더 발전해서 진짜 춘천에서 《춘천사람들》이라는 이름을 좀 날릴 수 있는 그런 신문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조합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한 가지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저도 들어오기가 좀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닫힌 느낌이랄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환경의 영향도 큰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정말 이사를 잘 온 듯합니다. 주차할 공간도 많고, 커뮤니티 공간도 생긴다고 하니까요.

박종일,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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