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욱(작가, 춘천문인협회 회원)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낯선 그가 싸롱에 나타난 건 늦은 오후다. 머리털이 어깨에 드리워질 만큼 긴 장발에 왠지 숨 가빠 보였다. 어두운 실내조명 탓에 잘 보이진 않지만, 이마나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혀 있을 듯싶었다. 그는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빈자리부터 찾는 모습이었다.

공교로웠다. 하필 그 시간대에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빈자리라면 벽 옆의 전등 빛에 의지해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 자리뿐이었다. 그녀 혼자서, 넷이 앉아 있을 수 있는 테이블을 전세 낸 듯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 탓에 그 자리 합석은 언감생심.

그런 경우, 대개의 손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싸롱 문을 열고 사라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싸롱 안을 서너 번 돌면서도 문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 맷 먼로의 감미로운 ‘Walk Away’가 흘러나왔다.

Walk away, please go before you throw your life away

A life that I could share for just a day

We should have met some years ago …

제발, 당신의 삶을 버리기 전에 멀리떠나주세요

단 하루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인생

우린 몇 년 전에 만났어야 했어(하략)

당신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부디 떠나 달라는 노래다.

하필, 앉을 자리를 찾아 싸롱 안을 헤매는데 부디 떠나 달라는 노래가 나오다니!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하긴 그 노래를 귀담아들을 만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같은 남자로서 우리(나와 친구 녀석)가 나서서 그에게 합석을 권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낯선 이와 합석했을 때 그 어색함이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니까.

그는 어쩔 수 없이, Walk Away 노래가 끝날 즈음에 ‘항상 고고한 자세로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의 자리에 실례를 무릅쓰고 앉았다. 옆이 아닌 마주 보는 자리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싸롱에 문 열고 들어왔다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앉아 있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게다. 이어지는 맷 먼로의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영화 모정의 주제가)”노래 소리에 우리는 그가 여자애한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러는 것 같았다.

“잠깐만 앉았다가 가겠습니다.”

물론 예쁜 여자애는 아무 말 없이, 못 들은 것처럼 계속 시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그는 예쁜 여자애와 말없이 합석했다가 다시 문밖으로 나가면서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앙로 거리에서 순경들이 가위를 손에 들고 장발 청년들을 단속했다는 사실을. 아아 우리는 자기 머리카락 하나 마음대로 기르지 못하는, 젠장맞을 시대에 살고 있었다. 

장발의 그가 다급하게 지하공간에 나타난 것은 순경들의 장발 단속 때문이었다. 만일 영화(映畵)였다면 그런 해프닝을 계기로 그는 예쁜 여자애와 썸씽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예쁜 여자애는 그 후로도 변함없이 항상 혼자 그 벽 옆자리를 지켰으니 말이다.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