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은희 조합원(참소리피아노학원 원장)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실내마스크 해제도 됐고 학원생들이 조금 늘어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이 힘드셨죠?

엄청 힘들었어요.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서 매출이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었어요. 그나마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금씩 나아지고 있네요.

우은희 조합원(참소리피아노학원 원장)

 

어떻게 버티셨어요?

자영업자들이 가장 힘든 건, 매출은 곤두박질치는데 월세는 제때 꼬박꼬박 내야 하는 거예요. 다행히 저는 피아노 학원, 이 공간이 내 소유여서 월세 낼 일 없으니 버틸 수 있었던 거죠. 안 그랬으면 벌써 문을 닫았을 겁니다.

학원생들 연령은 어떤가요?

코로나 전에는 초등생이 90%였고 나머지는 중고등학생들이었어요. 근데 학원생 중에 특히 입시 전공자가 확 줄더라고요. 그전에는 입시 준비생이 많았거든요. 불황이라서 그런지 예술전공 희망자들이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학생이 콩쿨에 나가면 가르치는 사람도 이래저래 챙겨줘야 할 게 많으니까 스트레스가 말도 못 해요. 살이 쭉쭉 빠져요. 하하

코로나를 거치며 새로운 수요가 생겼나요?

입시생은 줄었지만, 신기하게 성인들이 피아노를 배우러 오더라고요. 그전에는 없던 일이에요. 상당히 많아졌어요. 코로나를 거치며 자기 취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던데 그 영향인 것 같아요. 어제도 보건소에 다니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춘천시 평생학습관’에서 동아리 모임을 하는 데 저더러 지도를 맡아달라더라고요. 확실히 코로나를 거치며 세상이 달라졌어요.

그런 분들은 어떤 곡을 연주하고 싶어하나요?

이루마의 〈키스 더 레인〉 같은 세미클래식을 선호해요. 40대 초반인 남성이 학원을 처음 찾아왔을 때 이유를 물었더니, 1년 후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곡을 연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키스 더 레인〉이래요. 하하.

근데 이게 느린 곡이라서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감정을 실으려면 절대 쉬운 곡이 아니에요. 그래서 단기간에 안되니까 다른 곡으로 바꾸자 그랬더니, 다음날 아내가 좋아하는 여러 곡을 빼곡히 적어 왔더라고요. 그중에 하나를 찍어줬죠. 이런 식으로 각자 특별한 이유로 배우려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런 경우는 그 곡만 집중적으로 배우나요?

아니에요. 한 곡을 목표로 배우더라도 바이엘 상하는 꼭 배워야 악보도 보고 제대로 연주할 수 있어요.

이곳에서 오래 있었잖아요? 주변 환경도 많이 변했죠?

대구가 고향인데 춘천 남자와 결혼하면서 85년에 춘천에 왔어요. 아이 키우고 자그마한 곳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본격적으로 학원을 운영해온 지 이곳에서만 올해 25년째에요. 많은 변화를 보았죠. 코로나뿐만 아니라 저출산의 영향도 커요. 예전에는 인근 남춘천초의 한 학년에 5~6개 반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한 학년에 두 반밖에 없어요. 

여기 주변에 럭키·금호 3차·온의 마젤란·한주·보배 등 아파트가 많잖아요. 피아노 학원도 한 일곱 곳 있었는데 이제는 저만 남았어요. 간판이 걸려있는 학원도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이들이 적어지니까 학원 수도 줄어요. 아이들이 줄면 먼저 유아용품점이 줄고, 그다음 어린이집·유치원·각종 학원이 연쇄적으로 줄어들어요. 이래저래 살아남기 힘든 업종이 됐어요. 게다가 불경기에는 이런 예체능 계열 학원을 먼저 줄이잖아요. 그걸 모두 지켜보며 버텨왔죠.

호황기는 언제였나요? 

IMF 외환위기 지나고 2000년 초부터 좋아져서 한 2010년 되기 전까지는 나름 호황이었죠. 

그래도 잘 가르친 덕에 버틸 수 있었겠죠?

부정은 안 할게요. 하하. 하지만 그보다 내 학원이 동네 아이들의 참새방앗간이기 때문에 버티는 겁니다. 아이들이 피아노만 배우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심심하고 갈 곳 없을 때 놀러 오기도 해요. 해외 유학 간 제자들도 방학 때 오면 꼭 들려서 인사하러 와요. 피아노 전공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나요?

피아노를 너무너무 배우기 싫어하던 초등 1학년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엄마한테 멱살이 잡혀 끌려와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배우고는 안 왔어요. 그런데 중학 2학년이 되어서는 갑자기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그렇게 하기 싫어하더니 갑자기 마음이 변했대요. 청소년기에 갈피를 찾는 아이들이 간혹 있어요. 공부도 제법 잘했었는데 사실 피아노 실력은 조금 아쉬워서 작곡 전공으로 바꾸자고 권유해서 결국 한양대 작곡과로 진학했고 지금은 고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어요.

또 강원대 음대를 나온 제자들이 학원을 차릴 때 하나같이 멀리 떨어져서 학원을 내요. 선생님의 영업 구역은 넘보지 않는 거죠. 다들 이쁘고 기특해요. 하하.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생각만 해도 웃긴 데. 빚 받아내려고 피아노 배우기 시작했어요. 하하. 대구 동인동에 살았는데 그 동네가 당시 제법 부유한 동네여서 일요일만 되면 이집 저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넘쳐났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가 옆집에 적지 않은 돈을 빌려줬는데 돌려받을 기미가 안 보였어요. 하루는 어머니가 그 집에 가서 “우리 막내딸 피아노 가르치는 걸로 빚 갚으라”라고 으름장 놓으셨어요. 나는 피아노 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에요.

어머니가 유별나셨어요. 특히 교육으로. 그렇게 9살 때부터 빚 받으려고 피아노를 시작해서 중학교 시절에 피아노 전공을 결심했어요. 인생을 살아보니 어머니한테 정말 감사해요. 피아노 치기 싫어 게으름피우면 매도 참 많이 맞고 잘 놀지도 못해서 원망을 많이 했는데 이 나이에 저처럼 전문적인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드물어요. 퇴직한 친구나 지인들이 나를 참 부러워해요. 어머니가 정말 고마워요. 확실히 인생을 잘살아가려면 엄마의 매가 꼭 필요해요.

그래도 재능이 있었겠죠?

아뇨 전혀요. 오직 한가지 ‘엄마의 매’ 덕분입니다. 하하. 인생을 잘 살려면 재능과 끈기, 하다못해 엄마의 매라도 있어야 해요. 하하.

피아노요? 소질만 있는 애들은 절대로 전공을 하지 못해요. 반면에 소질이 다소 부족해도 끈기가 있으면 전공을 합니다. 입시를 위해 한 곡을 1~2년을 넘게 지겹도록 연습해야 하는데 끈기가 없으면 그거 못해요. 조성진, 임윤찬 같은 피아니스트들은 뛰어난 재능에다가 끈기까지 갖췄으니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죠. 

평생 피아노를 쳐오면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아들과 함께 연주회를 했을 때요. 대학 시절에는 끝없는 연주회와 각종 평가 등으로 늘 압박감에 찌들어 있었어요. 학원도 생업이니까 온전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죠. 그런데 클라리넷을 전공한 외아들과 둘이 연주회를 하게 됐는데 관객의 호응이 정말 좋았어요. 그때 정말 행복했어요. 연주회 연습할 때 아들하고 많이 싸웠는데 그것도 행복해요. 하하.

조합원은 언제 됐나요?

창간 초에 바로요. 그것도 참 엉뚱해요. 학원 아이들이 숙제하다가 한자를 물어보는데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한자를 배우려고 당시 허준구 선생님이 이끄는 ‘청연서당’에 다녔었는데 어느 날 거기 계신 안창용 선생님에게 《춘천사람들》을 소개받아 조합원이 됐어요. 한자 배우려고 발을 들였다가 춘사까지 이어진 거죠. 하하.

원래 사회 참여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네요?

예 전혀요. 그런데 춘사 이사도 했고, 지금은 춘천역사문화연구회 대표도 맡았으니 참 인생 몰라요. 춘사 덕분에 사회에 눈을 떴고, 춘천역사문화연구회를 하면서 춘천을 더 잘 알게 됐어요. 또 시민연대도 처음 접하게 됐고요.

임원 활동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은?

조합원이 되고 몇 달 지나서 전흥우 현 이사장의 권유로 이사가 됐는데, 처음엔 뭐 하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좀 파이팅이 넘치고 지구력이 강해요. 부딪히면서 하나씩 배워갔죠. ‘사회적경제한마당’ 같은 의미 있는 행사에서 시민들에게 춘사를 열심히 홍보했어요. 우리의 취지에 공감하며 조합원이 되고 구독자가 되어줄 때 참 뿌듯했어요. 초창기에 진짜 열심히 했어요. 지금은 한 발짝 떨어져 있는데, 관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임원을 해보고 어떤 애로점이 있는지 겪어보는 로테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춘천사람들》을 진단한다면?

조합원 각자가 바라는 춘사의 모습이 모두 다를 겁니다. 진보적인 정치적 색채를 바라는 조합원들도 있겠지만 창간 초에는 큰 신문에서 찾을 수 없는, 동네와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는 친근한 신문을 기대하는 조합원도 많았어요. 《춘천사람들》 로고에도 그런 뜻이 담겼어요. 솔직히 난 그런 신문이 좋아요. 그렇다고 신문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좀 아쉬워요.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지난번 강원도 신청사 특집이 좋았어요. 경북도청까지 가서 발로 뛰며 반면교사로 삼을 점을 잘 알려줘서 좋았어요. 제가 대구 사람이잖아요. 거기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 춘사가 잘 지적해줘서 좋았죠.

정치 얘기를 쓰더라도 정치 그 자체보다는 시민에게 끼치는 영향 등을 담으면 좋을 겁니다. ‘조합원데이트’도 좋아요. 조합원이 꽤 많잖아요. 자신의 이야기가 실리면 식은 관심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이쪽에 신축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며 주민이 늘어서 초등학교 설립 요건이 돼요. 초등학교가 지어진다는 말은 많은데 어떻게 되는 건지 살펴봐 주면 좋겠고, 또 나중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떤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마음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점에서도 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춘천사람들》에 바라는 점은? 

구독자가 늘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재정이 좋아져야죠. 하지만 기자들에게는 영업의 짐을 주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기자를 우습게 볼 수 있어요. 소액 광고 운동도 필요합니다. 할 일이 참 많아요. 

재능, 끈기 그리고 ‘엄마의 매’도 필요하다는 말씀 인상적입니다. 기자들이 재능은 없지만, 끈기는 있으니 ‘엄마의 매’가 되어주세요.

《춘천사람들》에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잔소리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 할거고요. 하하. 지치지 마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박종일,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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