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구 (문학박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우리 고장 춘천에는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으니, 봉의산과 봉황대 그리고 상중도 끝에 높이 솟아 있는 봉추대가 그것이다.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날아드는 상상 속 신령한 동물로 평화를 상징하는 대표 동물이다. 이 봉황은 오직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만을 먹고 아침 햇살이 떠오르면 오동나무에 깃든다.

봉황이 태평성대를 상징하게 된 까닭에는 순임금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순임금은 아주 오랜 옛날에 세상을 다스려 정치를 잘하여, 세상 사람은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며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았다. 그래서 누가 임금인지도 모르고 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 즐겁게 세상을 살았다. 이 시기에 순임금이 자신의 음악인 ‘소(韶)’를 연주하자 봉황이 날아들어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로부터 봉황은 태평성대, 즉 평화로운 세상을 뜻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 또한 이것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봉의산(鳳儀山)을 풀어보면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뜻이다. 비록 봉황이 상상 속의 동물이긴 하지만, 봉황을 머무르게 하여 태평성대를 유지하려면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깃들 수 있는 잠자리와 항시 먹을 것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춘천에는 봉황이 깃들 수 있는 오동나무는 자라지만 아쉽게도 봉황이 먹는다는 대나무는 춘천에 자라지 않는다.

우리 춘천에 살던 조상은 참으로 지혜가 많아서, 지명에 대나무 의미를 집어넣어서 봉황의 먹이를 마련하는 창의적이고 기막힌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죽림동(竹林洞)과 죽전리(竹田里) 그리고 죽전강(竹田江)이다. 죽전리는 다산 정약용이 지은 『산행일기』에도 죽전촌(竹田村)으로 등장하고 있어 조선 시대부터 불리던 지명임을 알 수 있고 죽전강은 엄황(嚴愰, 1580~1653)이 지은 『춘천읍지』에 죽흘천(竹屹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죽림동이 봉의산에 머무르는 봉황의 먹이를 마련하기 위한 지명이라면, 죽전리는 봉황대에 깃든 봉황 먹이를 마련 지명이다. 죽전리는 지금의 춘천역으로부터 공지천까지인 근화동 일대를 가리키던 마을 이름이고, 이 죽전리 앞을 흘러가는 강이 죽전강으로 춘천대교로부터 소양강 본류와 합쳐지는 봉황대 앞까지를 가리킨다. 

죽전강을 순우리말로 대바지강[대밭의강:竹田江]이라고 불렀는데, 즉 연철한 발음 대바지에 강을 붙여 대바지강[대밭+강江]이 된 것이다.

대바지강은 봉황대 앞을 흘러가는데, 봉황대(鳳凰臺)는 봉황이 머무르며 쉬는 장소로 여기에 머물던 봉황이 마시는 물이 대바지강이다. 봉황이 떠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로 근화동 일대에 대밭을 조성하여 죽전(竹田)이라 이름을 붙였고, 마실 물을 마련하는 배려로 대바지강을 조성하였다. 

춘천은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으며 이는 의도적으로 봉황을 머무르게 하려고 하는 우리 선조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봉황이 깃들 수 있도록 배려한 우리 조상의 지혜로 춘천은 평화를 사랑하는 생명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대바지강을 배를 타고 지나며 소양강 나루에 이르러 쓴 시를 소개한다.

소와 말 나루 머리에 서 있는데 (牛馬立渡頭우마립도두)

백로주에 강물 고요히 드나드네 (沙水復平安사수복평안) 

주변 분위기 도읍에 가까워(氣色近都邑기색근도읍)

넓은 들판은 험난하지 않네(曠莽無險難광망무험난)

강물 두른 누대 사방이 훤하고(江繞朱樓鬯강요주루창)

산은 아득히 멀고 들판은 넓어(山遠平蕪寬산원평무관)

강물에 배 부드러이 넘실 대며(便娟有柔態편연유유태)

거친 파도를 헤치며 나가는구나(麤惡羞狂瀾추악수광란) <後略>

<정약용, 「소양도시(昭陽渡詩)」>

허준구 (문학박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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