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 전국토에 설치한 9주 5소경 중에 수약주의 치소였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된 수약주의 치소로서의 모습은 문헌 사료와 고고 자료가 많지 않아 복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춘주(春州)의 치소 또한 문헌과 고고 자료가 많지 않아 통일신라시대의 주치소의 양상보다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최근 개발 논리에 따라 춘천 분지는 천지에서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고고학적인 물질 자료를 통하여 과거 통일신라~고려시대 지방 도시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고 있다. 즉, 지방 도시가 형성되면서 종교공간, 관청공간, 민간공간, 생산공간 등으로 계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춘천근화동당간지주」 주변 출토 ‘전’(좌:근화동 792-2번지 우:근화동 793-4번지)

이중 사원으로 대표되는 공간은 통일신라 하대(下代)에는 사원 관련 시설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물질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물질 자료를 근거로 보면 「춘천칠층석탑」 일원과 「춘천근화동당간지주」 부근에서 사원과 관련된 시설이 확인되었다. 「춘천칠층석탑」 일원은 도로 확장 때문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일본제국주의 체제하에서도 제자리를 지키던 석탑은 두 번이나 옮겨지는 비운을 맞이하였고 역사공원으로서의 위상도 어색한 상황에 있다.

「춘천근화동당간지주」 주변은 그동안 당간지주가 옮겨온 것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일소하는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2022년 근화동 793-4번지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고려시대 2호 건물에서는 「춘천칠층석탑」 주변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전(塼)이 확인되었다. 전은 일반적으로 ‘전돌’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권위 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이 ‘전돌’의 확인은 「춘천근화동당간지주」 주변이 종교 건물, 즉 사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게 하였다. 때문에 근화동 792-2번지 유적 보고서에 지표수습으로 보고된 ‘전돌’도 「춘천근화동당간지주」와 관련 있는 유물로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을 보면 ‘전’ 측면에 당초문이 표현되어 있는데 제작기법과 모양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돌’로 대표되는 이 유물과 함께 특수기와의 존재가 주목된다. 정식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지만 2022년에 조사된 소양촉진2지구에서 치미(鴟尾)와 귀면와(鬼面瓦)로 추정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막새가 근화동과 소양로를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단편적으로 출토되는 ‘전’, ‘치미’, ‘귀면와’, ‘막새류’를 종합하여 보면 지금의 춘천역과 소양로 일원에 걸친 도시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

춘천지역은 크고 작은 발굴조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조사 내용은 종합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발굴 자료의 종합과 관리는 그동안 단편적으로 보이던 춘천지역의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지방도시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될 크고 작은 발굴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관리하는 것이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는 발굴조사 기관과 연구자의 몫은 아닌 듯하다.

춘천시의 수부 도시로서의 역할과 시민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심재연 (한림대학교 한림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


참고한 문헌

강원문화재연구소, 2014, 「춘천 근화동 792-2번지 유적」.

경강문화재연구원, 2022, 「춘천 소양촉진2구역 재건축정비사업 시발굴조사 약식보고서」.

서경문화재연구원, 2022,「춘천 근화동(793-4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소규모 국비지원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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