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 소장한 ‘제1회 춘천징병검사실황’ 제보
1944년 징병제 전환…1945년까지 전국 21만 명

일제강점기 춘천에서 징병검사를 하는 모습이 담긴 생생한 사진이 발견됐다.

지난 7일 한 시민이 제보한 흑백 사진에는 ‘半島徵兵制度實施 第一回 春川徵兵檢査實況(반도징병제도실시 제1회 춘천징병검사실황)’이라는 글자가 뚜렷했다. 사진 속에는 욱일기를 옆에 앞세운 일본군들이 조선 청년 수십 명을 모아 놓고 징병검사를 실시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하지만 시기와 장소를 특정할 단서는 따로 없다. 사진 속에는 징병 대상으로 보이는 20명 안팎의 청년들과 검사를 실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특히 우측에는 욱일기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춘천에서 실시된 제1회 징병검사 장면. 한 시민이 제보한 사진으로 하단에 “半島徵兵制度實施 第一回 春川徵兵檢査實況(반도징병제도실시 제1회 춘천징병검사실황)”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춘천에서 시행된 징병검사와 관련한 기사는 《매일신보》 1939년 5월 19일 기사에 처음 나타난다. 함흥에서 시행하던 제19사단 징병검사를 1939년부터 춘천에서 시행하기로 해 그해 5월 17일 오전 8시부터 춘천중학교에서 춘천을 비롯해 인근 14개 군의 적령자가 징병검사에 출석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1940년 5월 8일 신문에도 징병검사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1940년 5월 6~7일에 강원도청에서 제20사단 관할로 징병검사를 시행한다는 내용이다. 만약 춘천지역 징병검사에 대한 《매일신보》 보도 내용이 처음이라면 이 사진이 1939년 5월 17일 춘천중학교에서 시행된 징병검사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대규모 병력보충을 위해 지원병의 형태로 조선 청년들을 징병하기 시작했다.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에 이어 1943년 7월 ‘해군특별지원령’을 공포하고 강제적인 동원·훈련을 시행했다. 1943년 10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해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문학교 이상의 재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렇게 동원된 학생들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2만3천681명에 이르렀다.

1942년 5월부터 노골적인 징병제가 추진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징병제시행 준비위원회 규정’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징병 적령자에 대한 신고를 일제히 단행했다. 국민총력운동조선연맹의 ‘애국반’이 총동원돼 적령자의 96%인 25만8천여 명이 신고된 데 이어 1944년 4월 징병제가 전격적으로 시행되면서 1945년까지 강제징집에 동원된 조선 청년들은 약 21만 명을 헤아렸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일제에 의한 강제징용피해자에 대해 제3자 변제방식을 채택하면서 일제의 만행에 면제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미 피해자들에게 전범 기업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행안부 산하 재단을 통해 국내 기업으로부터 돈을 거둬 주겠다는 굴욕적인 발상 자체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정의기억연대·민족문제연구소 등 611개 단체로 구성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지난 9일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윤석열 정부 강제동원 해법 무효! 범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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