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득용 조합원(봄·봄 ENT 대표)

코로나로 인해 월요일 신문 배송 봉사가 한동안 멈췄습니다.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지면서 언젠가부터 말없이 혼자 나와서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나오게 됐나요?

예전에는 많은 분들이 나오셔서 봉사하신다는 걸 단톡방을 통해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오히려 많은 조합원들이 참석하셨기 때문에 굳이 나오지는 않았었어요. 그냥 보고만 있었죠.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고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진이 안 올라오더라고요. 한참 지나고 나서 혹시나 가도 되냐고 물어봤지요. 그래서 나오게 됐는데 공식적으로 재개된 것은 아니어서 혼자더라고요. 그래서 ‘이거는 꾸준히 도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퇴직하고 한 2년 정도 지난 시점이기도 해서 음악도 좋지만, 사회적으로 뭔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아내도 가서 도와주는 게 어떠냐고 건의하기도 했어요.

정득용 조합원(봄·봄 ENT 대표)

예전 《춘천사람들》의 코너였던 ‘골목탐험대’ 행사에서 처음 뵀었습니다. 향교 앞에서 공연을 했고요.

맞아요. 골목을 걷는 행사였는데 미리 향교 앞에 세팅해 놓고 작은 공연을 했었죠. 같이 듀엣으로 공연하신 분은 김명선 씨입니다. 벌써 13년째 함께 공연하고 있습니다.

봄·봄이 원래 듀엣으로 구성된 팀이었나요?

아니에요. 원래는 맴버가 많았죠. 8~9명, 많을 때는 10명까지도 됐었어요.

차근차근 여쭤볼게요. 봄·봄은 어떻게 시작이 됐나요? 봄·봄의 역사를 말씀해 주세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텐데요. 하하. 제가 공직 생활을 했어요. 시청에서 근무했죠. 40대 중반쯤 사촌 제수씨가 연락이 왔어요. 원래 음악 활동을 하던 제수씨였는데 “아주버님 옛날 대학교 다닐 때 통기타 치시고 노래도 했는데 다시 한번 시작할 의향이 있어요?”라고 묻더군요. 그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잊고 있던 본능 같은 것이 꿈틀하더라고요. 그래서 제수씨하고 둘이서 봄·봄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시작하면서 주위의 도움도 받았죠. 당시 고슴도치섬 김성수 사장님이 연습실을 한 칸 줄 테니 대신 주말에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하게 됐죠. 당시에 고슴도치섬에 위락시설이 한창 많을 때였어요. 그게 아마 2000년대 초반이었을 거에요. 그렇게 시작하게 되면서 단원을 모집하고 늘어나게 된 거죠.

아쉽지만 고슴도치 섬은 폐쇄가 됐잖아요? 어떻게 되었나요?

어쩔 수 없이 시내로 나와야 했죠. 그런데 마침 브라운5번가에서도 비슷한 요청을 해왔어요. 지하주차장에 예전에 분양 사무실로 쓰던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을 연습실로 빌려줄 테니, 대신 프리머스 극장(현 롯데시네마) 앞에서 공연을 해달라고 했어요. 당시에는 극장 앞 광장이 공연장으로 인기가 높았어요. 젊은 친구들도 많이 오고요.

당시에 같이 했던 멤버 중에 기억에 남는 멤버가 있어요. 어느 날 극장 앞에서 여자 고등학생이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잘 부르는 거예요. 다비치의 ‘8282’라는 노래였는데 다비치보다 더 잘 불러요.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같이 하자고 말을 했죠. 이상한 사람 아니고 시청 공무원이다. 같이 노래하고 싶어서 그런다. 이렇게 말하고 부모님에게도 신분을 밝히고 했어요. 성유진이라는 친군데 나중에 가수로 데뷔를 했어요. ‘씨야’라는 그룹의 후속으로 ‘더씨야’라는 팀이 만들어 졌는데 거기 멤버로 들어간 거죠. (후평초, 유봉여중, 유봉여고를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거쳐 리쌍, 스컬, MC몽, 손호준, 티아라 등 유명한 가수들과 함께 작업한 곡이 다수 있는 실력파 가수-편집자 주)

춘천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분만 봄·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창 활동하던 때는 10명 정도가 됐어요. 그래서 다 같이 공연을 하기도 하고 몇 명만 모여서 하기도 했죠. 하지만 어떤 모임이든 사람이 많아지면 의견이 다양하다 보니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다들 음악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고집이 더 셌던 것 같아요. 나 좋자고 만들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다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한 뒤에 당분간 각자 활동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는 또 같이 맞춰보기도 하고 했죠.

공직 생활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퇴직한 지 3년 정도 됐네요. 저는 기술직렬로 시청에서 일했어요. 주로 수도과나 하수과에서 일했죠. 마지막에는 차량등록사업소에 있다가 퇴직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늦게 시작했어요. 서른세 살부터인가 시작해서 26년 정도 일했네요. 요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공직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친구들은 40년을 넘게 하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짧죠.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회사에 다니다가 춘천시 특채공고를 보고 지원하면서 공무원이 된 거예요.

초창기 때부터 《춘천사람들》 조합원으로 함께 했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춘사가 생기기 전에 시민연대에 있었어요. 거기에 있다가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죠. 요즘은 공무원이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데, 예전에는 공무원들도 정당 가입이 가능했어요. 원래는 공무원 노조에서 활동했어요. 2004년 전국 공무원노조 총파업에도 참여했었죠. 집사람도 그때 같이 참여했고요. 지금은 복직이 돼서 보건소에서 근무하지만 공무원노조 총파업 때문에 아내는 해직이 됐었어요. 해직 이후에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다가 정치를 하게 됐어요. 비례대표 도의원으로 4년 활동하고 지역구로 나왔는데 아쉽게 안 됐죠. 복직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내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강원대학교 농대에 입학했어요. 1960년생이지만 1년 늦게 들어가서 80학번이에요. 입학해서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 몇 명이 모여서 장기자랑에도 나가고 했죠. 또 강대합창단에서 노래도 했고요. 예전에는 효자동 양우아파트 자리에 실내체육관이 있었는데 합창단이 주로 거기서 노래했어요.

1학년 때 제1회 강원대학교 연적지 가요제가 열렸는데 남자 둘 여자 둘 이렇게 넷이서 팀을 결성해서 나갔는데 대상을 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의 아내가 가요제를 구경하려고 동네 동생, 친구들과 구경을 왔었죠. 그렇게 알게 돼서 지금까지 함께 하는 거죠.

와, 가요제 대상이라니 멋있게 보일 수밖에 없었겠네요. 혹시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요?

퇴직 후에는 아무래도 경제적인 수입이 줄어들죠. 그래서 적더라도 음악으로 수입을 창출하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봄·봄 ENT라는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냈어요. 주로 음향기기 대여나 공연을 하는 거죠. 첫 거래로 동내초등학교에서 했던 ‘대룡산 공지어놀이’ 행사에 음향기기를 대여했어요. 5월에도 홍천 내면에서 어버이날 행사가 예약돼 있고요. 많은 금액은 아니어도 용돈벌이 정도는 됐으면 해요. 아내에게 너무 베짱이처럼 보이면 안 되잖아요. 하하하.

마지막 질문입니다. 《춘천사람들》이 어떤 신문이 되었으면 하나요?

춘천에 관심 있는 분들 중에서는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분들도 많이 있죠. 정치적 편향성 때문에 떠나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춘사가 정치적인 신문보다는 정말 시민들을 위한 정론지가 됐으면 하고 바라요.

장수진,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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