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시인)

이왕이면 내 인생의 결말이 해피엔드였으면 한다. 분꽃이나 채송화 따위 그 속절없는 것들의 소멸이 슬플 것도 드라마틱할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해피엔드이듯이. 그런데 떠날 준비가 정을 떼는 게 아니라, 마음 붙일 것들을 조금씩 늘려 가는 것이라니. 나는 옛날 채송화를 만난 걸 좋아라, 씨를 받으며 스스로를 나보다도 훨씬 나이 많은 남 바라보듯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박완서 작가의 10주기 기념 에세이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에세이 660편 중 35편을 선별하여 실었다. 그 중 <마음 붙일 곳>에서 한 구절을 적어본다. 선생님의 환한 미소를 보며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의 깊이로 세상을 헤아리고 사람을 포근히 감싸안을 줄 아는 사람이고 싶었다. 2011년 1월 어느 날, 실검 1위는 ‘박완서’였다. 예상대로 작고(作故)하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 순간 사고로 먼저 하늘로 간 아들을 만나셨겠구나, 생각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해 스스로 죽어지길 바라다가도 잘살고 있는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며 처연해지더라는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2002년 『두부』에 나오는 ‘교도소에서 출소하면 두부를 먹이는 이유’에 무릎을 쳤던 기억, 그때부터 에세이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1990년 『나는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가』, 2002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2010년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등등. 이 에세이집은 세상 사람들이 작가보다 모두 착해 보이는 날이 있고 그런 날은 살맛난다는 <유쾌한 오해>, 영악한 진실 앞에 자비심이 먼저 발동하는 덜 똑똑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을, 못된 버스차장 아가씨에게 화를 내지 않고 발동하는 모성애를, 전철에서 결혼사진을 들고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넣어주어 주고 얼굴 붉히던 날을 그린 <사십대의 비오는 날>시리즈, 주소를 잘못 알고 배달한 택배기사와의 후회스러운 에피소드가 실린 <나는 나쁜 사람일까? 좋은 사람일까?>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편마다 선생님의 성정이 잘 깃들어 있다. 멋 부리지 않는 기품있는 문장, 밖으로는 끝없는 온기를, 안으로는 냉철함을 잃지 않는 작가로서의 시선, 그리고 진솔함이 좋았다. 김유정문학촌에서 작가들의 육필 원고를 전시한 적이 있다. 나는 선생님의 다감한 육필 원고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우리 어릴 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많았다. 행복한 결말이라 단정하였지만 정작 주인공들의 미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 적이 있다. 인생의 결말이 해피엔드가 되기 위해 우리는 크고 작은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어야 할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까. 나는 오늘도 나의 해피엔드를 꿈꾸며 당신과 나의 안부를 함께 묻는다. 강제 동원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봄날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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