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숙(상담학 Ph. D.)

최근에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그동안 사회에서 간간이 드러냈던 학교폭력의 어두운 면을 날것의 모습으로 드러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일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 문제를 드러내고 그동안 감춤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던 자기방어를 걷어 내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세상을 향해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 고통을 좀 더 깊은 상처를 내면서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외침은 아픈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 터널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일은 학교폭력을 시작으로 정치계, 예능계, 종교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시작된 작은 물결의 파동이 세계로 번져 나가 일렁이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무엇 때문일까?

아직 아물지 않아 과도하게 드러난 상처가 때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몸서리 쳐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쓰라린 상처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기에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움츠림과 거리 두기는 너무나도 당연했고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좀 더 깊은 상처를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보여지는 상처는 감싸고 치료하고 세월이 가기를 기다리면 흉터는 남을지언정 치유가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드러내지 않으면 알 수도 없기에 자기방어가 없이는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더욱 상처를 숨기고 싶어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지나도 흉터가 보이지 않아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는 아프지만 드러내고 마주 봐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최근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오랫동안 성폭력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집안의 숨겨진 은밀한 검은 모습들을, 자신의 학교폭력을 어른이 돼 지금 그 시절의 고통을 드러내는 행동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들이고 결단이다. 

필자는 드라마의 내용 중 정말 공감되는 대사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상처를 내서 새살이 다시 차오르도록 해야 한다.” 

더 깊은 상처란 마주 보는 용기이다. 마주 봄은 있는 그대로를 안전한 대상을 통해 보는 것이다. 꽁꽁 숨겨둔 나의 상처가 없다고, 괜찮다고, 지나갔다고 말하지 않고 들어줄 대상을 향해 고통스러웠고, 버거웠고, 피하고 싶었다고 말해보는 용기를 내기 바란다.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더 깊은 상처를 내는 시작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새살이 차오르도록 기다리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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