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시인은 ‘강’이라는 시에서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고 말한다. 대신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황인숙 시 ‘강’ 中)라고 독하게 충고한다.

이 시의 영향 때문인지, 괜스레 마음이 요동치는 날에는 혼자 강가를 찾곤 한다. 세상이 쏟아놓은 말들이 가슴에 얹혀 답답할 때, 하소연할 수 있는 강이 있다는 건 춘천살이의 큰 장점이자 낭만이 아닐까. 춘천에 오기 전까지는 강이나 바다가 가고 싶을 때마다 야구장을 찾곤 했다. “와아~”하는 함성이 쏟아지는 탁 트인 경기장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홈런처럼 날려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춘천 고구마섬은 가 보기 전부터 은근히 기대가 컸다. 강가와 야구장이 함께 있는 섬이라니. 지도로만 봤던 고구마 모양의 섬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봄내길 4코스인 사농동의 춘천인형극장 박물관 옆길로 내려가면 ‘고구마섬 야구장 600m’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설렁설렁 걷다 보면 ‘오미교’라는 다리에 다다른다. 고구마섬과 연결된 이 짧은 다리는 2006년에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에 등장했던 장소다. 극 중 연인인 봉태규와 정유미가 다시 연결되는 장소가 하필 다리였기에 기억에 남아있다. 영화 속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직접 만난 오미교 앞 벚나무는 한창 꽃잎을 틔우는 중이다. 

고구마섬 안에는 세 개의 소규모 야구장이 있다. 강원도 최대 규모인 2천여 명의 춘천 야구동호인들이 참여하는 호반리그가 이곳에서 열린다. 춘천에 이렇게나 많은 야구동호인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우면서 반갑다. 아마추어면 어떠한가. 뜨거우면 되는 거지. 강원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야구경기를 살짝 엿보고, 고구마 뿌리 쪽을 향해 걸었다. 끝으로 갈수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나무와 수초들이 얽히고설켜 다채로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캠핑하는 사람, 고요한 물가에서 아기를 재우는 남자를 지나자 마침내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내 이야기를 진득하게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역시 강이 제격이다. 

그늘이 좋은 버드나무 아래 앉아 강물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검은등할미새가 총총거리며 뛰어가다 꼬리를 까딱거리더니 공중에 어떤 글자를 그리며 날아간다. 할미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봄바람에 춤추는 버드나무와 찰랑거리는 물소리,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이 남아있었다.

이나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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