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흥우 이사장 

꽃잎이 튀긴 좁쌀을 닮았다는 조팝나무 꽃들이 하얗게 무리를 지어 피어났다. 조팝나무 꽃이 피었으니 이팝나무도 꽃을 피울 날이 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식구는 많고 쌀은 부족해 노란 좁쌀로 밥을 짓거나 하얀 찰옥수수를 맷돌에 갈아 쌀에 섞어 밥을 짓곤 했다. 꽃들의 전성시대인 봄은 가난한 농부들에겐 배를 곪는 시기였다. 아랫지방에서는 보리 수확을 기다리는 보릿고개였지만, 보리조차 심을 수 없던 강원도 산골에서는 보릿고개조차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허기를 달래느라 논두렁을 헤집어 ‘메’ 뿌리를 캐어 먹기도 했고, 들판에 우후죽순으로 올라오는 찔레 순을 꺾어 먹기도 했고, 산에 올라 참꽃(진달래)을 따 먹기도 했다. 그래서 가난한 시절에 쌀밥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이밥에 고깃국’이 삶의 목표일 만큼 우리네 삶은 척박했다.

예전에 인기가 많았던 한 드라마에서 고려 말에 농민들이 이성계 덕에 쌀밥을 먹게 됐다면서 쌀밥을 ‘이밥’이라 부르며 환호하는 백성들을 그린 장면이 있었다. 고려 말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겸병兼倂’하면서 농민인 ‘전호佃戶’는 물론이고 관료들조차 녹봉을 받지 못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위화도회군’ 이후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전제를 개혁해 과전법을 시행하고 농민의 경작권을 보장했다. 과전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조세 부담이 대폭 줄어들자 농민들도 쌀밥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이밥’이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아직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은 ‘이밥에 고깃국’이 정권의 명운을 걸 정도로 큰 난제이기는 하지만, 남한에서는 쌀이 남아돌아 걱정이다. 지난 4일 대통령은 국회에서 의결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정부와 대통령실은 국민의 60%가 찬성하는 개정안에 대해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번 개정안의 세부내용에 대해 시비를 따지기 전에, 여당이 옳으니 야당이 옳으니 정쟁을 벌이기 전에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역대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농정이 있었는지 말이다. 쌀의 과잉은 벼농사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서구식 식생활이 정착하면서 비롯된 문제이긴 하지만, 쌀을 단지 시장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쌀은 여전히 우리의 주식이다. 쌀을 재배하는 논은 엄청난 담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을 겪으면서 식량안보와 가뭄·홍수 등 이상기후가 초래한 물 부족 문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논 면적은 1992년 131만4천ha에서 2022년 77만5천ha로 줄었다. 지난 30년 동안 자그마치 강원도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논이 사라졌다.

쌀 소비 감소를 탓하며 직불제 확대나 대체작물 전환을 언급하기 전에 쌀과 관련된 다양한 산업을 육성하는 데 과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묻고 싶다. 쌀과 논, 단지 시장의 잣대로만 재단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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