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흥우 이사장

1905년 9월 19일 증기선 ‘만추리아’가 제물포항(인천항)에 들어왔다. 아름답고 매력이 넘치는 스물한 살의 미국 여성이 그 배에서 내렸다. 그녀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였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막 끝났을 때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제의로 일본과 강화협상을 벌인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일본의 기세는 욱일승천이었다. 갈수록 노골화하는 일본의 침략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고종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미국의 공주” 엘리스를 극진히 대접했다. 제물포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에 온 엘리스는 황실 악단이 미국 군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화려한 황실 가마를 타고 덕수궁에 입궁했다. 그러나 엘리스는 고종이 연회에 승마복을 입고 나타나 명성황후의 릉에 있는 석마를 올라타는 등 막장 행동을 보여 많은 사람을 경악시켰다.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시기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꿈”이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열망은 미국의 세력을 아시아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1898년 8월 하와이를 합병하면서 본격적인 태평양 진출의 신호탄을 쏜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면서 쿠바와 필리핀은 물론이고 푸에르토리코와 괌의 지배권까지 얻었다. 미국은 하와이와 필리핀을 거점으로 태평양을 건너 중국과 아시아로 세력을 팽창할 계획이었다.

1905년 6월 무렵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만추리아’에는 태프트 육군장관과 상·하원 의원 30여 명을 비롯해 다수의 관계자가 타고 있었다. 엘리스도 함께 승선했다. 하와이를 거쳐 일본·필리핀·중국·한국으로 향하는 ‘역대급’ 아시아 사절단이었다. 이 사절단의 임무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권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 대가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약속했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불리는 비밀협약이 이 순방에서 이루어졌다.

고종은 일본의 야욕을 막아줄 마지막 희망을 미국에 걸고 엘리스를 극진히 대접했지만, 이미 미국은 일본에 한국을 먹잇감으로 내어준 뒤였다. 일본을 먼저 방문해 밀약을 맺은 뒤 한국을 방문한 엘리스의 눈에 황제라는 사람의 ‘헛다리 짚기’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루스벨트는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니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 만인에게 좋다”고 확신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휘둘러야 한다”고 했다.

요즘 대통령의 외교 행보를 보면 세계인들은 정말 한국의 자치 능력을 의심할까 걱정이다. 도대체 얼마나 큰 몽둥이로 얼마나 세게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싶다. 엘리스가 대한제국을 떠난 직후 일본은 고종을 압박해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그로부터 비롯됐는데, 봄이 다 가는 요즘 세상이 참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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