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화강원이주여성상담소   중국어 통역상담사
손홍화
강원이주여성상담소
중국어 통역상담사

내가 스스로 춘천사람이라고 생각하기까지 1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처음 사업을 위해 춘천을 찾았을 때는 그저 산이 많고 호수가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정착해서 살아내기에는 쉽지 않았다. 나는 중국 길림시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약 10여 년간 무역 일에 종사했다. 당시 무역에 상당한 성과를 인정받아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던 터라 출장으로 한국을 오가며 학교 교사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자연스레 춘천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무역 일을 할 만큼 소통이 가능했기에 한국 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도시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춘천에서의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처음 시부모님을 만났을 때의 말이 기억난다.

 

“한국말을 잘해서 참 좋다.” 

 

처음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가 한국어를 참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대화의 60% 정도만 이해할 수 있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동서가 축하하는 의미로 “이사했는데 전기밥솥 사드릴까요? 무엇이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기뻤으나 바로 무엇을 사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필요 없어요”라고 했다. 대답 대신 돌아오는 것은 의아한 눈빛이었다.

또 한 번은 내가 만두를 만들어 시어머니께 드린 것을 안 시누이가 “올해 설에는 만두를 빚어도 되겠어요”라고 말을 걸었다. 나는 그때 ‘빚는다’ 말의 의미를 몰랐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을 굴리는 동안 멀뚱멀뚱 서로 쳐다만 보고 있으니 분위기가 아주 어색해졌다. 그렇게 대화는 점점 적어졌고 언제인가부터는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4~5년쯤 지난 어느 날 딸의 고등학교 입시설명회에 참가했다.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이해가 되지 않아 슬펐다. 정착하려고 노력했던 매일 매일이 물거품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너무 쉽게 이주를 결정한 내가 원망스러워 다 포기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다시 나를 다시 살게 해준 것은 여전히 좋은 춘천의 강과 골목과 사람들이었다. 입시에 대해 몰라서 물었을 때, 친절히 답해주던 남편과 시어머님, 그리고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 우울할 때 산책하면서 다닐 수 있는 공지천, 내가 살던 곳의 골목에서 만나던 이웃들의 따뜻함. 무엇보다 나보다 더 춘천을 좋아하던 나의 딸.

나는 지금 강원이주여성상담소에서 통역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내가 춘천으로 이주하며 겪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그들이 좀 덜 겪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정원사는 정원을 예쁘게 가꾸어 보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고 하면 이주여성상담소에서 나의 일은 이주여성들이 한국에서 아름답게 꽃피워갈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약사천을 걸어 출근했다. 나는 N년차 춘천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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