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흥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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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지난 4월 29일 약사동 카페 설지에서 있었던 초청 강연에서 장발장은행장 홍세화 선생이 제시한 숫자인데, 하루 노동시간의 변천사다. 산업사회 초기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펴낼 당시 노동시간은 14시간으로 줄었다. 현재의 8시간 노동제는 수많은 노동자가 오랜 세월 투쟁 끝에 얻은 결과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시간은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였지만, 하루 12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가 절반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8시간 노동제였지만, 1970년대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노동시간이 점차 줄기 시작해 1991년까지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주 44시간 노동제가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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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는 죽음의 숫자이다. 매일 살인으로 죽는 사람이 1명, 산업재해로 숨지는 사람이 5명,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이 12명,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37명이다.

통계개발원이 지난달 28일 발간한 <한국의 안전보고서 2022>에 따르면, 2022년 산재 사망자 수는 2천223명으로 나타나 하루 평균 6명을 넘어섰다. 노동자 1만 명당 1.1명이 산재로 사망하고 있는데, 2019년 이후 지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자살자도 더 늘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6명으로 OECD 가입국 중 압도적으로 1위다. OECD 평균인 11.1명보다 2배 이상이나 높다. 연간 자살로 사망하는 사람이 1만3천352명이다. 매일 37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노동절이었던 지난 1일 강릉 법원 앞에서 검찰 수사에 항의하며 분신했던 한 건설노동자가 2일 끝내 숨졌다. 고인은 건설사에 조합원 채용과 건설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을 요구하다 검찰에 기소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올해 50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인 고인은 검찰 독재와 노동자를 걸림돌로 생각하는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꼭 만들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많은 경우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그리고 이번 노동자의 분신 사망은 ‘정치적 타살’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 시기인 19세기 초 프랑스 반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라고 말했다. 비록 수구적인 반계몽주의 선동가였지만, 그의 이 말만큼은 참으로 온당하다. 수준에 맞지 않는 정부를 끌어내는 것도 그 국민의 수준이다. 그러나 홍세화 선생의 말을 빌자면, “해선 안 될 일만 하는 여당”과 “해야 할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야당”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민은 얼마나 불행한가.

내게 이로우면 정의고, 내게 해로우면 불의라고 생각하는 사회, 존재를 배반한 의식에 사로잡혀 소통과 설득이 불가한 사회에서 이성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의지로써 낙관하자는 말이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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