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희 독자위원장

연애편지 쓸 때도 이렇게 망설이지 않았다. 그저 일개 독자의 구독 소감을 써야 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4월 24일자 신문을 읽고 나니 숨이 헉 막혀 왔다. 이렇게 기사를 세게 실었을 줄이야…. 싸움은 구경이나 좋은 법이지 정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부인> 말이다.

해당 신문에는 4월 초부터 약사천 시화전에 출품 중이었던 한 시인의 작품이 철거된 문제를 1·2면의 기사를 비롯해 14면 SNS 제보와 15면 칼럼에서까지 다뤘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꼬집고 풍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시인의 말은 옳다. 시인과 사전에 상의도 없이 작품을 철거한 기관도 서툴렀고 친절하지 않았다. 작품 한 점당 5만 원의 사용 승인을 얻었기에 철거에 문제없다는 대응을 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슬퍼지기도 한다.

예술에는 경계가 없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 예술이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을 때는 누구나 조심스럽다. “시가 흐르는 효자동 약사천에서 힐링하세요”라는 주제가 무색하게 모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시를 읽으며 산책하게 될 줄 알았던 마을의 담벼락은 사건의 현장으로 휑하게 비워지고 말았다. 신문은 일제히 시인 편에서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며 “문화폭력”에 “억압”, “서글픔과 분노”, “무지와 오만의 극치”로 담당자와 해당 기관을 성토했다.

이쯤에서 행사를 마련한 담당자들이나 시민들의 의견도 더 들어봤으면 어땠을까. 양쪽 이야기를 균형 있게 들어보고 서로의 입장을 좁혀볼 수는 없었을까. 원작자의 동의 없이 작품을 철거했다는 사실이 폭력이고 억압이며 무지와 오만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사실 자체만 전달했으면 어땠을까. 신문을 읽는 사람들의 감정도 함께 끌고 들어가지 말고 담백하게 일의 전말을 알려줬더라면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대상자가 후작 부인이든 공무원이든 제3자의 인격권도 지켜져야 한다는 거. 시간이 흐르고 분노가 가라앉을 지금이면 떠오르지 않을까. 우리 모두 ‘춘천 사람들’이니까.

14면에는 <시민제보>로 산란기를 맞아 둥지를 만드는 흰뺨검둥오리를 소개했다. “고양이나 강아지 눈에 안 띄도록 꼭꼭 숨어 있어야지”라는 주민의 사랑스러운 걱정이 담겨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제보’라는 표현이 그 감동을 조금 사무적으로 만들었다. 1면 중간 광고 마지막에 “당신의 제보에서 시작됩니다”라는 문구도 조금 불편하다. 제보라는 말로 분위기가 훼손되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제보’보다 ‘참여’가 나으려나?

4월 20일은 제43회 ‘장애인의 날’이었다. 3·4면에서는 기획특집 기사로 민선 8기의 장애인 시책을 다뤘다. 9면의 ‘시민데이트’는 춘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의사소통이 힘든 발달장애인도 스스로 선택하고 여행을 누릴 수 있는 <여행 갈 지도>를 구상하고 제작하고 있다는 담당자의 인터뷰가 좋았다. 응원한다.

시민기자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춘천의 구석구석을 소개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전하며 이슈가 될 문제들을 발굴하고 있다. 다만 십인십답(十人十答), ‘열 명의 시민에게 묻다’ 기사 두 꼭지 중 한 기사는 여덟 명, 다른 한 기사는 두 명의 답변만 소개했다. 합해서 열 명이라는 의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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