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이영춘



남편은 부엌에서 마늘을 찧고
나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베란다에선 앵무새가 제 짝을 부르는지
죽어라 울어 대고
고요로운 햇살 두 볼을 만지작거리며
살곰살곰 거실로 발을 옮기는데
발길에 묻어오는 아침나절의 햇살 풍경
풍경 속에서 칼도마 두드리는 소리
참, 맛있다


연암 박지원의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를 읽으며옛 선비가 깨친 문리(文理)를 짚어보다가 공연히 마음만 어지러워져 서책도 생각도 잠시 덮고, 낮에 이메일로 보내주신 선생님의 시편을 읽어보는 밤입니다. 어느새 밤은 깊어 짐승들도 잠자리에 든 시각이라 창밖은 저리도 고요합니다.

고요한 까닭이겠지요? 시제(詩題)로 쓰신 “한 때”를 “한 生”으로 바꿔 읽습니다. 쓰기야 선생님께서 쓰셨지만 읽는 것은 독자인 제 마음이니 괜찮겠지요. 이해해주시겠지요. 시란 것이 본디 곡설(曲說)이라 독자의 곡해(曲解) 속에서 진경(眞景)이 펼쳐지기도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노부부의 한 생이 저렇게 지나가는구나. 앵무새처럼, 앵무새가 되어, 서로의 말을 거울처럼 되비추면서,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가면서, 그렇게 함께/홀로 깊어진 한 생이었겠구나 참, 참, 맛있는 한 생이었겠구나, 그렇게 읽습니다.

먼 훗날 아주 먼 훗날, 선생님의 시구를 차용하여 아내에게 이 말을 꼭 들려줘야겠습니다. “이번 생은 당신과 함께여서 참 맛있었다”고 말입니다.

어느새 밤을 지나 새벽입니다.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내내 여여하시길요.

박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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