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연말연시는 으레 떠들썩했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느낌이다. 최근 소비자심리지수가 6개월 만에 하락한 것을 비롯해 각종 경제지표가 우울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굳이 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여기저기 송년회로 일정이 분주하기는 하다. 송년회를 예전에는 망년회(忘年會)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일본식 표현이라 잘 쓰지 않지만, 한 해 동안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을 모두 잊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로 망년회라 불렀다.

한 해를 마무리하자면 의당 기억(記憶)해야 할 일도 있고 망각(忘却)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고단해지고 물밀듯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부분은 기억보다는 망각의 늪에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희망도, 현재도 없으며, 망각은 곧 힘이고 건강이라고 했다지만, 지금 망각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집권자들일 것이다.
이 정권 초기부터 불거진 공약파기 및 인사실패는 차치하고라도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부터 세월호 참사, 이른바 십상시의 국정농단, 메르스 부실대응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진상과 책임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채 유야무야 되거나 되어가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나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경우도 어느 순간 망각의 늪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집권자들에겐 오직 이 한 마디가 무기일 것이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昏庸無道(혼용무도)를 선택했다고 한다.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이 통치를 하니 무도(無道)한 세상이 됐다는 말이다. 혼군과 용군은 어리석은 임금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혼용무도가 어디 올해에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9월 말 기준 국내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이 작년보다 약 44조원이 늘어 약 742조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재벌기업의 막대한 사내유보금에도 불구하고 오직 서민들 호주머니만을 털지 못해 안달하는 정치, 일자리를 늘린다면서 대다수 국민을 불안한 노동시장으로 내모는 정치를 계속 용납하는 한 혼용무도한 상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치(政治)에서 비롯된다. 우리 삶을 규정하는 법과 정책, 그리고 그 실질적인 집행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의 수준과 방향을 결정하는 힘은 바로 일반 국민, 즉 인민(人民)의 의식과 철학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붙잡아야 할 때다.

전흥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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