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秦)나라 시황제의 업적은 대단하다. 전국시대 이후 광대한 영토의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으며, 흉노족의 남하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도량형을 통일했다. 승상인 이사(李斯)를 시켜 육국(六國)의 문자를 정비해 소전(小篆)을 만들어 이후 전 중국이 하나의 문자체계 아래 놓이게 됐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이 산만하게 만들어 쓰던 인장제도를 관제에 따라 정비해 후대의 모든 왕조와 번국(藩國)에서 본받게 한 것도 일반인이 잘 모르는 중요한 업적이다.

시황제는 황제의 인장(印章)만을 옥으로 만들어 새(璽)라고 부르게 했다.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금·은·동으로 구별하고 크기를 달리하였는데, 인장의 위에 올라가는 손잡이인 뉴(紐)의 형상, 인장의 손잡이 밑에 구멍을 뚫어 꿰서 어깨에 메는 끈의 색까지 규정했다. 그러므로 인장의 크기와 재질, 인뉴의 모양, 인장의 끈의 색를 보면 그 관리가 무슨 벼슬을 하는 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관직을 줄 때 사령장을 주지 않고 인장을 주었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인장은 진흙에 찍었으며 이렇게 찍힌 것을 봉니(封泥)라고 했다. 공문을 쓴 죽간이나 목간을 둘둘 말아 끈으로 묶고, 그 묶은 곳에 진흙 덩이를 붙이고 그 위에 인장을 찍어 당사자가 아니면 공문의 내용을 볼 수 없게 한 것이다. 부하는 상관의 인장을 찍은 봉니를 가지고 있다가 공문이 오면 인장을 대조해 맞으면 그대로 시행하고, 다르면 가짜이므로 공문을 가져온 사람을 죄인으로 다뤘다.

주지하는 것처럼 진나라는 얼마 못 가서 멸망하고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나라를 세웠다. 이 때 한나라는 진나라의 인장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300여년 동안 유지됐으므로 한나라의 인장은 지금까지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굴로 인해 금·은 등 귀금속 도장은 녹여서 금과 은으로 팔려나가 그 양이 많지 않다. 반면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구리도장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아 현재까지 많은 양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한(漢)의 동인(銅印)이다. 그러므로 한의 인장을 대표하는 것은 동인이다.

동인은 두 종류가 있다. 인면(印面)의 벼슬 내용을 아예 처음부터 주물로 부어서 만드는 주인(鑄印)과 도장 모양만 주물로 부어 만들었다가 나중에 벼슬의 내용을 끌로 파서 만드는 착인(鑿印)이 그것이다. 착인은 주로 전쟁이 벌어지면 갑자기 지휘관들을 임명하게 되므로 주로 이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급히 만들었다 하여 급취장(急就章)이라고 했다.

한의 동인은 금속에 인간의 문자를 새겼으므로 자연의 모습이 있을 수 없으며 거의 인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장 상태에서 수천 년 동안 풍화를 입어 녹이 나 획이 불어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해 원래의 형상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선질(線質)이 만들어져 인간이 만들어내기 어려운 조형성이 생긴 것이다. 원나라 이후 돌에 인장을 새길 때 작가들은 한인의 선질과 조형성을 본받아 창작했다. 그러므로 한인은 전각이 예술로 발전하는 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각예술의 튼실한 시원(始原)이 되었던 것이다.

원용석 (전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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