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소처럼
늙어라

유강희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그러고도 한 번도 진실로 후회해 본 적 없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반짝, 들려주는 녹슨 양철지붕을
먼 산봉우리인 양 머리에 인 채 늙어 가는 시골 정미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길 바라네


“xⁿ+yⁿ=zⁿ (n은 3 이상의 정수)일 때,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의 <마지막 정리>에 관한 이야기는 내게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8년 동안 오직 이 문제 하나에만 매달렸던 Andrew Wiles가 증명(1993년)하기까지 350여 년간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페르마가 한적한 툴루즈 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지내면서 취미로 수학을 즐겼을 뿐 수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또한, 증명과정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수학자를 자발적 은둔자, 외톨이로 이끌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한 조각의 고깃덩이리가 강아지한테 던져졌을 때처럼, 나는 흥미와 호기심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습니다. 내 여가의 한 부분을 수학으로 채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용감히 고개를 든 것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마음 위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지난 학기 ‘수량경제분석입문’을 수강하면서 마주한 수학은 비록 동료 수학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이해에 이르기는 했지만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고 법정스님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활 속의 발견(serendipity)을 왜곡하지 않고, 탱탱한 마음을 유지하며, 수줍은 영혼으로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는 하루입니다.

이충호 (영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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