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8일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농성장에서 박그림 선생님은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들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농성장의 기울어진 바닥에 여럿이 모여 앉아 춥고 축축한 춘천의 밤공기 속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11월 중순의 싸늘한 밤, 우리는 몸의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날 박그림 선생님은 산양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 비밀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사랑은 그랬던 것 같다. 결코 익숙하지 않을 것 같던 담배연기 냄새를 좋아했고, 상대방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표정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눈빛만으로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내가 사람이 아닌 다른 종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지금 내 사랑은 일곱 살과 네 살인 아이들이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결코 익숙하지 않을 것 같은 냄새들, 오줌 냄새와 똥 냄새에 익숙해져 있다. 이제는 아이들의 땀내와 똥꼬 냄새에도 그저 웃고 만다.

그래서 나는 산양똥에서 계피향이 난다고 얘기하는 박그림 선생님의 말을 놓칠 수 없었다. 그 향이 좋아서 일부러 맡는다는 말을 놓칠 수 없었다. 냄새가 좋다는 건 아무 때나 생기는 일이 아니다. 사랑할 때만 생기는 아주 특별한 일이다. 산양똥에서는 계피향이 솔솔 날 것이다. 아니면 은은한 풀냄새가 날 것이다. 산양똥에서 정말 계피향이 나는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산양똥 냄새를 맡아서 행복한 한 사람을 떠올리면 그만이다. 산양이 좋은 박그림 선생님에게는 산양똥마저 예뻐 보일 것이다. 그러니 그날 산양의 털, 뿔, 보금자리, 암컷과 수컷을 구별하는 방법, 산양 어미와 새끼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면서 선생님은 기뻐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의 맹목적인 산양 사랑에 압도되어 등을 돌릴까봐 최대한 담담하게 얘기하지만 기쁨을 숨길 수는 없었다.

왜 하필 산양일까?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운동에서 산양 얘기가 나오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박그림이란 사람이 못 말리게 산양을 사랑하고 그 산양을 죽게 할 수 없어서 이 운동을 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라는 잘 정리된 문장 때문에 나는 자칫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진심을 놓칠 뻔 했다. 어쩌면 박그림 선생님은 전생에 산양이었는지 모른다. 산양처럼 작고 날렵한 한 사람이, 산양처럼 맑은 눈을 가진 한 사람이 45일째 도청 앞 추운 농성장에 있다.

임혜선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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