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천리 아주머니는 논밭의 곡식을 이미 거둬들였다. 바쁜 일은 끝났다. 느티나무 아래 앉아 평온한 얼굴로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북한강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가평으로 갈려면 어디로 가야죠?”

“가정리로 나가 고개를 넘는 게 제일 빨라유.”

“강 따라 가는 길도 있지 않나요?”

“있는디 비포장이라 어떨른지 모르겠네유.”

시내버스는 하루에 세 번 들어온다. 춘천 나가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고 담담히 말한다. 아들이 오면 자가용을 타고 가평으로 볼 일을 보러 나간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해서인지 춘천의 오지가 된 관천리는 아직 개발의 세례를 적게 받았다.

가정리로 나가지 않고 북한강 쪽으로 과감히 발길을 돌렸다. 2㎞ 정도 가자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잠시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멀리서 갈대가 하얗게 웃으며 손짓한다. 누런 갈잎이 웃으며 떨어진다.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고향 길을 걷고 있었다. 흙길의 느낌이 밑에서부터 전해지자 아무 생각 없이 만추(晩秋)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춘천 근교에 이런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오롯이 자연 속에서 나를 느낄 수 있다.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돼 그 속에서 유람했다. 강이 굽이칠 때마다 길도 함께 굽이친다. 산 속을 걷다보면 어느새 나무 사이로 강물이 반짝이곤 한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강과 멀리 떨어졌던 산길은 물길 옆으로 다가서서 나란히 걷는다. 아직 붉은 흙길이다.

잠시 멈췄다. 강 건너는 경기도 가평군 금대리다. 정약용이 하룻밤 유숙했던 곳이다. 금대리는 비령대·쇠터·원뎅이 등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금대리란 마을이름은 쇠터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청평댐이 생기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마을 앞강에서 사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정약용의 시에도 언급돼 있으니 사금채취는 아주 오래됐던 것 같다. 댐이 생기기 전에 앞강에는 뗏목이 줄을 이었다. 양구·인제 등에서 벌목한 나무들은 이곳을 지나 서울로 흘러갔다. 떼꾼들은 금대리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한 잔 막걸리로 잊었다. 주막이 마을 앞쪽에 세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도 떼꾼들이 한 잔하던 곳에서 한 잔 하며 시를 지었을 것이다.

 

 

 

사금 채취하는 곳마다 모래를 이는 물결들 淘金處處浪淘沙
밤이 되어 금대리 술 파는 집에 정박했네 夜泊金墟賣酒家
사랑스러워라, 문 앞 짙푸른 물 흐르는데 愛此門前紺綠水
어선은 버드나무 옆에 그림처럼 비껴 있네 漁船如柳邊斜


1942년 청평댐이 생기며 뱃길은 끊기고, 마을은 강가에서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잔디고개에 있는 장원한 정려각은 아랫마을 산유리 강가에 있었다. 댐이 생겨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정려각을 불태워 재를 묘소에 묻었다가 1997년에 다시 지었다. 장원한은 열두 살 때 아버지 병환이 위독하자 대신 죽기를 기원하며 밤낮으로 통곡하고, 변을 맛봐 달고 씀에 따라 병세를 살폈다고 한다.

국도를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갔다. 수확이 끝난 논엔 동그랗게 말아 하얀 천으로 포장한 짚이 이젠 생경하지 않다. 강가는 별장과 펜션, 그리고 수상레저 시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길은 강으로 연결되고 경계점에 조그만 배가 여름을 기다리며 흔들거린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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