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리에는 고흥류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재궁동이란 지명도 수락산에 류몽표의 아들 류숙이 시묘살이를 했던 재실에서 비롯됐다. 류숙은 1608년(선조41)에 강원도관찰사를 지내며 춘천과 인연을 맺는다. 인조반정 이후 당쟁에서 밀려 가정리로 내려와 지역의 주요 가문으로 부상했다.

성황숲은 가정3리 마을회관을 지나 문배마을로 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음기가 넘쳐나는 숲은 그냥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숲에는 오래 된 고로쇠나무와 물푸레나무, 쪽동백나무, 갈참나무, 복자기나무 등이 다양하게 자생하고 있다. 신목이 있는 성황숲은 부정이 타지 않도록 손을 대지 않아 천연림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생강나무, 국수나무, 고추나무 등의 교목과 천남성, 애기똥풀, 으아리, 멸가치 등 초본식물도 많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매년 음력 정월 초순경 유교식 산제를 지낸다. 제단은 3개가 있다. 윗 당집은 산신지위(山神之位) 위패가, 가운데 당집엔 토지지신(土地之神) 위패, 아래 당집에는 재궁동산제당(齋宮洞山祭堂)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산제당 제사는 위 당집, 가운데 당집, 아래 당집 순으로 진행된다. 위 당집은 하늘(天)에, 가운데 당집은 땅(地)에, 아래당집은 마을사람(人)을 위해 제사를 올린다. 제사를 마치면 주민들의 출입을 허가하고 하당에서만 소지를 올리게 한다. 집집마다 소원을 적은 종이를 소지한다.

이곳 지명인 쟁골은 재궁동산신당을 모신 골짜기란 뜻에서 그렇게 된 듯하다. 보통 소나무 위주로 구성된 일반적인 성황숲과 달리 아름드리 활엽수로 구성돼 보존가치가 높다. 또한 마을의 문화적·역사적 배경이자 신앙공간으로서 숲은 큰 의미가 있다. 주민들은 6·25전쟁 당시 마을에 총소리 한 번 나지 않은 것을 성황숲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맨 위 상제당 주변의 노박덩굴 굵기가 60cm가량은 돼 보여 숲이 100년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전엔 주민들이 제당을 돌아 개울을 건너다닐 정도로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숲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가치가 무너져 숲 곳곳에 손을 댄 흔적이 많아 안타깝다.

숲의 훼손은 마을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신앙 공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숲의 원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숲은 다음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시대의 소중한 유산이다.

김남덕 (강원사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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