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풍물시장 10동 64호
낙원떡집 송병석·박복순 부부

뭉툭한 돌절구. 낙원떡집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문 앞에 놓인 돌절구다. 기계로 떡을 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떡을 이 돌절구에 쳐서 떡을 만든다는 송병석(78)·박복순(70) 부부.

낙원떡집은 100% 국내산 곡물로 떡을 만들어 떡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단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취떡, 수수부꾸미, 인절미, 영양떡 등 떡 종류도 다양하지만 단연 최고 인기는 취떡이다. 자연산 취와 찹쌀을 쪄서 돌절구에 쿵쿵 쳐서 만든 취떡은 식감부터가 다르다. 이미 그 소문이 인터넷으로 퍼지면서 지금은 5일장이 서는 장날이면 수도권에서 밀려오는 손님들로 눈코 뜰 새가 없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불경기를 체감하지 못한다. 평일에는 다소 한산하지만 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펴기도 힘들다. 장날 하루 매상은 적게는 70만원에서 많게는 120만원.

이들 부부가 떡집을 시작한 때는 외환위기가 몰아치던 1997년. 20년이 다 돼간다. 처음 약사동 풍물시장 시절엔 아내가 혼자서 떡집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온 지 2년 정도 지나서다. 당시 남편인 송병석 씨는 건축일을 하고 있었다. 송씨가 온전히 떡집일에 함께 한 것은 2005년부터다.

남편 송씨는 춘천 학곡리가 고향이지만 부인 박씨의 고향은 부여다. 춘천에 사는 언니 집에 놀러왔다가 남편을 만나 1966년에 결혼했다. 꼭 50년이 지난 세월, 그들의 지나온 삶의 역정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3년만인 1969년에 남편은 늦은 나이에 군 입대를 했고, 제대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10여년을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생활했다. 그 사이 아내는 서울 연희동에서 떡집을 시작했다. 그때는 그리 길게 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외국에서 돌아온 뒤 대치동에서 제대로 떡집을 운영했다.

왜 ‘낙원떡집’이냐고 물었다. “옛날 서울 낙원동에 떡집이 많았어요. 일본놈들에게 나라가 망하자 궁궐에 있던 궁녀들이 궁궐과 가까운 낙원동에서 떡을 만들어 팔았다고 해요. 그렇게 낙원동이 떡으로 유명해졌다고 해서 우리도 그냥 이름을 그렇게 지었지요.”

두 부부 모두 칠순이 넘은 나이. 앞으로 어떤 계획이나 바람이 있을까? 팔순을 내다보는 남편은 한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호기를 부리는데, 아내는 “몸이 힘들어서 잘해야 2~3년”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모시떡을 꼭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다. “모시떡이 맛있어요. 서산에서 모시 씨앗을 구해 직접 재배한 모시로 모시떡을 한 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시장에 행사가 있을 때면 많지 않은 돈이지만 기꺼이 찬조도 한다는 낙원떡집 부부. 나중에 아들이 떡집을 맡아 운영하면 좋겠다고 한다.
그저 무덤덤하게 말할 뿐이지만,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열심히 사는 노부부의 20년 떡 인생을 듣다보니 이런 평범함이 어쩌면 춘천풍물시장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었다.

전흥우 시민기자

5일장이 서지 않는 평일의 시장은 나른한 햇살 아래 자리 잡은, 할머니가 가지고 나온 나물의 이름 하나 하나 알아보고,
시장 거리를 혼자 차지하며 산보하듯 걸어 다녀도 좋을 만큼 여유롭다.
이런 여유로움이 아니고서는 시장 사람들을 독차지하며 이야기 나눌 틈이 없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풍물시장의 또 다른 명물 세 분과 만났다.
불그레한 얼굴이 늘 웃는 모습인 <풍물수산회센터> 신규풍 대표,
신뢰가 아니면 망한다는 마음으로 무수히 깨지며 배운 약초상 <부범물산> 윤교선 대표,
기계의 편리를 포기하고 고된 손맛을 고집하는 <낙원떡집> 송병석·박복순 부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문을 남기는 장사 속으로만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오랜 세월 시장통에서 몸으로 겪어낸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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