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나루는 가정자 자리 앞에 있는 홍천강의 한 나루다. 이 나루는 1944년 청평댐 건설로 청평호가 생기면서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고란터나루, 황골나루와 함께 세 곳의 나루가 있었다. 그리고 술워니고개를 넘어 방하리나루에서 배를 타고 가평까지 가는 방하리나루도 있었다. 소주고개로 통하는 도로와 방하리로 통하는 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이곳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쟁골로 난 산길을 걸어서 강촌까지 가서 춘천시내로 가는 교통편을 이용했다.

이곳에는 주막도 있었는데, 주막에서는 술도 팔고, 음식도 팔고,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주막이 꽤 컸다. 홍천에서 내려오는 떼꾼은 이곳 주막에서 쉬고 다시 강을 타고 한강으로 내려갔다. 청평댐으로 막히기 전부터 이미 이곳에는 나루가 있었다. 청평댐이 생기기 전에는 호수가 아니라 여울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사는 집이 아주 많았다. 아주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곳과 이어진 황골에 경찰지서까지 있을 정도로 번창한 곳이었다. 강 건너에는 떼내(뗏목이 내려와서 붙들어 매고 쉬었다고 해서)와 말골이 있었고, 강을 건너면 홍천 모곡으로 바로 닿을 수 있었다. 보리 매상이나 밀 매상을 할 때면 모두 지게에 지고 가정나루까지 왔다. 여기 가정3리의 쟁골 사람들까지 매상을 할 때는 가정나루까지 보리와 밀을 지게에 지고 왔다. 그때 점심내기 한다고 무거운 매상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쉬지도 않고 가정나루까지 걸어오기도 했다.

청평호가 생기고 나서 처음 타고 다녔던 배는 작업선이었다. 청평댐을 막을 때 쓰던 배를 건져서 나룻배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배는 휘발유를 하루에 5드럼씩 먹을 정도로 기름이 많이 들었다. 나중에 타고 다니던 배는 ‘똑떼기’라 불리던 똑딱선이었다. 이 배를 타고 사람들은 가정리에서 가평까지 오갔다. 아침에 두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운행했다. 지금은 가정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나루는 없고 그 명칭만 남아 있다.

이학주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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