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5천여명이 넘는 페이스북 팔로워들. 그가 하는 말과 글과 활동들은 그의 움직임과 동시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저 한 명의 개인이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졸속적인 합의를 해버린 정부를 규탄하고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대학생들과 함께 노숙농성을 해왔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의 방해활동에 대해 ‘대한민국효녀연합’이라는 풍자적인 피켓시위로 거리에 나섰던 이야기,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얼굴도 예쁜 개념녀’라는 불편한 호칭에 대한 단호한 대응 등 인터넷 상에서 알려진 이야기 이외에 ‘춘천사람’ 홍승희의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에 대해 듣고 싶었다.
지난 1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렌트푸어를 풍자한 ‘존재의 집’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홍승희 씨.

페이스북에서 활동이 줄어든 것 같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지금껏 해왔던 방식과 태도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 살아있는 구체적인 말들을 하기 위해 침묵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쉬면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책 읽고, 사람들과 진심을 나누고 있다.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신에게 춘천은 어떤 곳인가?
 
좀 보수적이고, 꽉 막힌 느낌이랄까? 어린 시절 춘천이 너무 싫었다. 교사·공무원이 많은 탓인지 틀에 박힌 답답함이 떠오른다. 당장 아버지만 해도 공무원이신데,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그래도 춘천이 좋은 것은 안개가 끼는 것이다. 특히 비오는 날의 물안개, 우울한 기운이 정직하게 느껴져서 안개 끼는 게 너무 좋다. 분위기 있다.
 
삶의 본질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답답한 한국사회와 삶과 죽음, 개인과 공동체,
일상과 예술이 공존하는 인도

서울뿐만 아니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2년 정도 어디 정착하고 그런 게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게 됐다. 그 중에 인도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 불규칙적인 것이 너무 좋아서 계속 살고 싶을 정도다. 그 곳은 예술과 일상과 공동체와 개개인의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다. 죽음의 문제를 삶과 밀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반면 한국은 울타리와 이름표가 너무 많은 느낌이다. 답답하다. 사회적 존재가 아닌 오로지 소비자로서 존재한다.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자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예술마저도 소비의 대상이며 삶의 근본적인 질문도 기능적으로 소비되고 있어 공허하다.

고등학과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로봇처럼 공부만 요구 받는 것, 이건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먼저 검정고시를 봤기 때문에 다른 길도 있겠구나 싶어 고등학교 원서접수를 안 했다. 학교를 벗어나서 지역아동센터에서 보조교사로 봉사활동 했는데, 우연히 아이들이 학대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내가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나보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대로 도우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다가 장애인 이동권 예산삭감에 분노해서 언니랑 같이 대자보도 쓰고 피켓도 들고 촛불집회도 나가면서 개개인의 문제라 생각했던 것들이 다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열심히 운동하는 선배와 교감하면서 반값 등록금 투쟁 등 생활정치 영역에서 여러 활동을 했다. 자신감과 해방감을 느낀 시간이었다.
 
변화 위해 사람이 도구화되는 운동 방식에
회의 느껴… 모두가 자기 안의 빛을 발견하는
예술가 되는 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임을 깨달아…


대안정치, 생활정치, 학생운동 등 당원활동 중심에서 내면의 의식을 표현하는 활동으로 그 내용이 바뀐 것 같다.

언젠가부터 활동방식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변화를 위해서 사람이 도구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존재에 대한 허무감이 밀려오게 됐다. 그때 우연히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처음으로 내 마음의 언어들을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게 됐다. 그러면서 상처들이 치유되고 많이 회복됐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안의 빛을 발견하고 예술가가 되는 게 세상이 변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그 후로 그림으로 소통하는 작업이나,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작업을 많이 하게 됐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내가 주인이 되고 치유되는 과정이다. 결과물은 중요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는 과정은 새로운 삶의 언어를 만나게 된 느낌을 주었다.

페미니즘을 만났다. 어떤 의미인가?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처음 알게 됐을 땐 나열된 여러 이론 중 하나로만 인식해서 등지고 살았는데, 페미니즘은 그게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 자체를 꼬집고 뒤트는 것이다. 페미니즘 자체로 담을 수 없는 것들도 많지만, 내 삶으로부터 증언하는 소리가 변화의 시작이고 이것이 공명으로 울려 퍼지고 다른 삶의 메아리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고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은 주어가 명확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은 내 감각과 느낌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거의 없다. 각자의 삶의 언어로 표현하고 증명하는 게 중요하다.
 
내 삶으로부터 증언하는 소리가 변화의 시작,
이것이 울려 퍼져 다른 삶의 메아리가 되는 게
중요해… 페미니즘은 소외된 목소리를 드러내고
증언하는데 유용한 인식틀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설악산 지키기 활동을 함께 하고 싶다. 언니가 강아지를 키우는데, 처음에는 ‘강아지 길러서 뭐하지?’ 이런 생각이었는데, 강아지를 돌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게 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예전에는 누군가에게 저처럼 살라고 말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말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관계의 힘을 많이 느끼게 되는데, 당장은 그런 관계를 까페 36.5도와 감성노리(협동조합)부터 회복해 나갈 계획이다.

홍승희는 격렬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 안의 무수한 문을 하나하나 열고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때로 페미니즘, 때로 그림과 명상, 그리고 생활정치나 학생운동이었을 것이다. 아직 그 안에는 열리지 않는 많은 가능성의 문들이 있고, 그 문이 열릴 때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함께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번 문은 ‘관계의 힘’이라고 한다. 그가 여는 관계의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 기다려진다.

김병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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