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춘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춘천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인 윤도순·박순교·이준용·허기준 등에 의해 3월 중순부터 계획돼 3월 28일 시내장날에 맞추어 벌어졌는데, 그 수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동아일보 1929년 3월 7일자 박유덕 관련 기사

그런데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10년이 지나 춘천의 항일운동사에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29년 3월 7일 본정서(경성남부경찰서)에서 이봉학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검거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경성에서 검거된 이봉학은 기미년(1919) 만세운동 10주년을 기념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격문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제2의 만세운동을 위해 화천에 잠입한 이봉학은 간동면 대산리 사립학교 보통교사 박영래와 격문배포를 모의하다 발각돼 경성으로 피신했으나, 본정서 고등계에 검거됐다는 내용이다.


1929년 3월 7일 검거된 이봉학의 정체는 박유덕으로 밝혀졌다. 박유덕은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춘천의 만세운동에서 붙잡힌 수십 명의 춘천군민을 탈주시키고 만주로 피신한 춘천경찰서 순사였다. 동아일보는 그해 3월 8일자 2면에서 이 사건의 내막을 대서특필했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남부경찰서에 검거되었던 이봉학의 본명은 박유덕인데, 춘천군 신북면 마장리 박근성의 장남으로 1919년 만세운동으로 잡혀온 춘천군민들 수십 명을 탈옥시키고 만주로 피신해 만주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소위 거물이었다. 당시의 기사에는 박유덕이 하루에 250리를 주파하는 준족으로 한 번도 차량을 이용한 적 없이 전국을 도보로 걸어 다닌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돼 있다.

본정서 형사에게 체포돼 끌려가는 박유덕(오른쪽 흰옷). 사진출처 : 동아일보

이후 박유덕은 조사과정에서 조선공산당 북만주 책임비서의 중책을 맡고 있었음이 드러나 재판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형무소에 수감된 박유덕에 대한 기록은 다시 1년여가 지난 1930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에 등장하는데 박유덕의 무료 변호를 맡았던 김병로 변호사의 증언이다. 김 변호사는 박유덕은 경찰조사과정에서 생긴 위확장 증세로 배가 붓고 복통이 심하며 소화불량증세로 신음 중이라고 증언해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물고문이 있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박유덕이 형무소 생활을 하는 1930년 이후 박유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박유덕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어서인지 춘천의 독립운동사에서 박유덕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박유덕의 후일 행적에 관한 문제를 떠나 춘천의 1919년 3월 만세운동사에서 경찰 순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수십 명의 국민을 탈옥시키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박유덕의 업적이 재평가 돼야 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상당부분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관련 단체에 따르면 1931년 이후 어느 기록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박유덕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망했는지 석방 후 다른 길을 걸었는지 재조명하는 일도 춘천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대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동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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