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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⑤]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

한·일 ‘위안부’ 입장, 정권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다. 그는 1980년부터 국내 및 일본 오키나와와 훗카이도, 중국, 태국, 미얀마, 파푸아뉴기니 등 해외 각지의 피해자 100여 명을 만나며 실태 조사를 다녔고, 이러한 결과를 1988년 4월 세미나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윤정옥 교수의 발표 이후 여성단체들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해 일본정부를 향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990년 6월 “일본군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고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끌고 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고 김학순 할머니는 정대협을 찾아가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했다.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는 17세의 나이에 석 달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하다 탈출한 사연을 공개했다.
 
 1993년 6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이 제정되고 피해자 등록이 시행됐다. 2017년 7월 기준으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며 그 가운데 201명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현재 38명의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다.
 
 ‘고노담화’로 인정한 강제성, 아베가 뒤집다
 
 1996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가 낸 보고서가 유엔 인권위에서 채택됐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적 성노예(enfor ced sex slave)’라고 정의했다. 또 1998년 9월에는 유엔인권위 산하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차별소위)에서 특별보고관 게이 맥두걸은 “일본정부가 군위안소에 직접 관여한 것은 명백하다”고 지적하고 “일본정부가 군위안소에 책임이 있는 생존자를 확인해 처벌하는 의무를 다하도록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 나서줄 것”을 권고했다.
 
 결국 일본정부는 1993년 8월 ‘고노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였다. 고노담화는 ▲장기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위안소 설치·관리 및 이송에 가담했다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로 이뤄졌고 참혹했다는 등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전달한다”고 밝혔다. 담화 발표 이후 대다수의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에 대해 기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담화 이후 일본 내에서 “위안부는 역사 사실이 아니다”, “위안부는 공창(公娼)” 등의 망언이 끊이지 않았고,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극우파들은 1997년 결성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을 통해 역사왜곡에 앞장섰다. 이후 2006년도판 일본 중학교 교과서 본문에서 ‘위안부’에 대한 서술이 사라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06년 9월 총리가 되자마자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으므로 교과서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국회에서 주장하고, 2007년 3월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은 없었다’는 국회 답변서를 각의 결정문으로 내놨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다. 고노담화 이후 만든 아시아여성기금도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법적 책임이 해소된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 민간모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겠다는 취지임을 강조했다. 이에 반발한 피해자들은 다수가 보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역대 한국정부의 태도도 오락가락
 
 한국정부는 정권에 따라 태도가 오락가락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는 진실규명과 사과는 받되 배상청구는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에 대한 외교적 노력보다는 피해자 지원에 초점을 맞춰 대응해 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일본정부, 군 등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비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어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결정했다.
 
 미국 하원은 2007년 7월 30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했다는 내용을 담은 ‘위안부 결의안’을 상정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후 네덜란드 하원(11월 8일), 캐나다 연방하원(11월 28일), 유럽연합 의회(12월 14일)도 연달아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명박 정부는 초기에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2011년 12월 18일 교토, 이듬해 2015년 5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일수뇌회담에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해결을 직접 촉구했다.
 
 아베 정부는 2014년 6월 고노담화 검증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고노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의 문안조정이 있었다”, “군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는 없었다”는 것으로 고노담화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한일 양국의 협의를 통해 편집된 정치적 산물로 깎아내렸다.
 
 박근혜 정부의 밀실합의, 다시 원점으로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월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선 일본의 자세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으나, 같은 해 12월 28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와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합의내용은 ▲일본정부의 책임 인정과 아베 신조 총리의 사죄 ▲한국정부 주관으로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 설립 및 일본정부의 예산투입 ▲주한 일본대사관에 있는 소녀상의 적절한 해결 등이었다. 양국 외교부장관은 이러한 합의사항의 착실한 이행을 전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정부의 합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사자들과 사전협의 없이 진행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반발을 샀고,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책임 인정도 없이 합의문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고 못 박은 점이 문제로 대두됐다. 그 대가로 소녀상 철거를 밀실합의 했다는 의혹도 샀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도 2016년 3월 7일 “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며 분명히 했고,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도 같은 해 5월 12일 한일간의 위안부 합의를 수정하라고 권고했다.
 
 일본정부는 합의대로 2016년 8월 한국정부가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108억원)을 전달했다. 일본정부는 “10억엔은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다수는 일본정부가 지급한 돈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는 “일본정부의 위로금인 10억엔 반환을 통해 합의 무효화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100만 국민모금을 오는 1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한다. 그리고 끝까지 위로금을 거부하는 열두 명의 할머니들에게 ‘100만 시민의 이름으로 여성인권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주한 일본대사관과 부산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이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위배하는 것이라고 항의하며 지난 1월 6일 주한 일본대사와 총영사를 귀국시키고 한·일 통화 스와프 협상중단을 선언하는 등 외교적·경제적 압박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틀째인 지난 5월 11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 첫 통화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10억엔의 성격이 무엇인지 명백하지 않고, ‘불가역적·최종적 합의’라는 것은 군사적 합의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며 한일간의 협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김인규·최정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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