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다른 지역 초등학교에서 교사연수 강의가 있었다. 교육연구회에서 마련한 자리였고, 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교사의 교실에서 연수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시각,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빈 교실에서 담임교사는 전화통화 중이었다. 시작 시간이 되었지만, 통화는 끝나지 않았고, 10분을 넘겨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4학년 아이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툼이 있었고, 교사는 문제해결을 위해 걸려온 두 아이의 어머니와 긴 통화를 한 것이었다. 두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다과를 나누는 시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노인과 어르신이라는 단어를 보여주고 어떤 단어에서 더 긍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노인보다 어르신이라는 단어에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더 나아가 노인은 고집스럽고 돌봄이 필요한 대상처럼 여겨지고, 어르신은 존경의 대상으로서 소통이 가능한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듯이 같은 존재를 다르게 표현하면 이미지가 달라지고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이 물음으로 글을 시작하는 까닭은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숨은 본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머무는 공간은 본래 6개
‘설리’가 자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그런 가운데 인터넷 한 귀퉁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쓰인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의 글쓴이는 “연예인이란 대중들에게 있어 ‘사람’인가”라는 질문과 “연예인의 자살에 공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글쓴이는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란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있어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그들의 삶이 대중들의 삶과 괴리가
인간에게 공감은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이다. 특히 인터넷, SNS 등으로 관계보다 개인의 삶 위주로 변화하는 시대에 다른 사람들 속으로 파고드는 공감 능력은 성공과 행복의 필수 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공감 능력이 늘 도덕적인 행동의 근간이자 호의적인 반응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공감은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면서 잔인해지는 전제 조건으로 드러나거나,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 책은 더 나은 사회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공감이라는 긍정적인 이면 뒤에 도사린 문제점과 실체도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