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낳은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다. 인류 역사에 축적돼 왔던 인간의 직관과 통찰력을 인공지능이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국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사회현상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특정한 대결구도 속에서 파악하는데 익숙하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 부른다. 정치의 진보와 보수, 지역사회의 개발과 보존 등이 그것이다. 프레임은 복잡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누가 내 편인지를 식별해준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은 인공지능과 인류의 대결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세계적으로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 가까운 미래에 이러이러한 직업이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 등이 이 프레임을 더욱 구체화한다. 기성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보도는 마치 인공지능과의 대결을 위해 인류사회가 하나로 뭉칠 것 같은 비장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인공지능과 인류의 대결 프레임에는 민주주의나 공동체와 같은 가치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사태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는 말이다. 신뢰를 잃은 언론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20일 매력적 제호의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가 인쇄신문 발행중단을 선언했다. 앞으로 인터넷신문만 발행하겠다는 것이다. 인쇄신문의 위축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만든 결과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와 같은 흐름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로봇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미 로봇이 알고리즘을 통해 기사를 작성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기사에 필요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모두 구할 수 있는 경우 인공지능이 훌륭하게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고, 언론사들 간의 경쟁이 극심한 한국사회에서 로봇 저널리즘은 의외로 매우 빠른 시간에 대중화할 가능성이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은 인공지능에 비춰 저널리즘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신속성, 정확함, 분석력은 인공지능이 우세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나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인공지능에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는 인쇄매체로부터 출발한 저널리즘의 본질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슬로우 미디어’의 복원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신문을 ‘슬로우 미디어’라 부르고 있다. 슬로우 푸드에 미디어를 대입한 것이다. 패스트푸드가 우리의 건강과 공동체를 위협하듯이 인터넷·스마트폰과 같은 패스트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일상에 지친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뉴스, 인쇄매체만이 시도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획, 지역사회의 권력에 대한 감시를 원한다.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둘째, 작은 미디어다. 우리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지리적 범위는 매우 좁다. 춘천만 해도 공동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다. 작은 미디어는 매스미디어가 보지 못하는 공동체 속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학생 수가 적다고 학교를 없애는 시대다. 공동체를 유지해온 토대가 하나둘 허물어져가고 있다.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학교만큼이나 공동체 신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춘천사람들>을 응원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문이다. 로봇 저널리즘 시대에서 느리고 작은 <춘천사람들>이 지역사회의 건전한 공론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홍성구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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