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나치정권은 유대인 800여만명을 학살했다. 1933~1945년 사이에 저지른 일이다. 세계의 신앙인들은 이 참혹한 인간의 행태를 역사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여기서 출발한 것이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의 신학’이다.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눈을 감는 자기만족의 종교심을 수술대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역사에 고통스러운 이정표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소득 없는 일인 양 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 자수성가해서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물질적 유익에 기대서서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겨워 신에게 의탁하는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멀게 하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아이들마저도 학교감옥에 가두고 괴물훈육을 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며 살았다. 이런 구린내가 쉰내처럼 몸에 배어있었지만 몰랐다.

미국의 트래블러스 보험사 관리 감독자였던 하인리히(H. W. Heinrich)가 주창한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다. ‘1:29: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는 재해와 사고를 통계학적으로 규명하는 법칙인데, 산업재해로 중상자 1명이 나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경상자 29명이 있으며, 역시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아찔한 순간을 겪은 사람이 300명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윤추구를 위해 생명의 안전과 사회적 규범을 철저히 무시하는 개인, 집단, 체제의 이기주의가 빚어낸 사회구조적이고 종교적 방임에서 비롯된 범죄다. 서구사회가 나치 만행 이후 ‘아우슈비치 이전과 이후의 신학’을 구축했듯이, 이제 우리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를 시대의 책임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십자가가 인간의 죄를 편안하게 용서하는 희생의례쯤으로 생각하던 신학을 넘어서고, 그 십자가가 인간 예수의 고통이자 인류의 고통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고통인 것을 느껴야 한다. 타인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들을 폭로하고 대적해야 한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 이전의 나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는 일이고, 세월호 참사 이후의 나를 생명대동의 마당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허태수 (성암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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