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인간의 속 깊은 내면을 기리는 말보다는 허세를 꼬집는 말들이 더 많다. 많을 뿐더러 아프고 따갑다. 겉만 번드르르할 뿐 속은 비었다는 뜻의 외화내빈이나 실속 없이 큰 소리만 치는 허장성세도, ‘속빈 강정’이니 ‘빛 좋은 개살구’니 하는 말도,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인간 없다’는 속언까지 - 그 안엔 누구도 만만하게 피해갈 수 없는 날카로운 칼끝이 숨어 있다.

사실, 꾸미거나 부풀리는 짓은 인간을 포함해 삼라만상이 가진 공통된 속성이다. 깃털의 색을 화려하게 바꾸거나 몸을 한껏 부풀리거나 민망할 정도로 교태를 부리는 것은 교미기의 동물들만이 하는 짓은 아니다. 악취가 너무도 심해 ‘시체꽃’이라는 별명을 가진 열대밀림의 거대식물 타이탄 아룸은 스스로 2미터까지 꽃대를 키우고 악취를 최대한 멀리 퍼뜨려 수정을 도와줄 파리나 딱정벌레를 유혹한다.

하지만 생존과 번식이라는 절대적 명제가 따른다는 점에서 동식물들이 행하는 치장과 인간의 그것을 대놓고 비교하는 건 어폐가 있다. 인간이 하는 꾸미고 부풀리는 짓에는 다른 목적성이 있다기보다는 꾸미고 부풀리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인간 역시 자연의 존재라 번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상대가 필요하고, 그 필요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꾸미고 부풀리는 짓을 하도록 만든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교미기를 폐기함으로써 어느 때고 번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해온 인간은 꾸미고 부풀리는 짓을 자연의 존재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속성의 일부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대의 문화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아마존 밀림의 부족에서 온갖 첨단 문명을 일상복처럼 입고 사는 현대인까지 화장(化粧)과 분식(粉飾)은 결코 양보하지도 내려놓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는 초등학교 여학생까지 비비크림과 립스틱을 필수품으로 여기는, 몸을 뜯어고치는 성형을 화장술의 일종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허황함의 대명사인 막장드라마에 혀를 차면서도 넋을 빼놓는 ‘사생팬’과 ‘오타쿠’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는 의식의 진보나 철학적 성찰을 신속하고 맹렬한 속도로 구시대의 유물함에 처박아 넣고 있다.

외양을 과장스럽게 치장하는 일은 개인의 일만은 아니다. 과대포장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진열하고 광고하는 기업들의 주요 전략 가운데 하나며, 국정을 운영하는 정부는 수시로 뻥튀기를 한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 경제식민지를 건설할 때 맨 먼저 내거는 것이 평화와 우호라는 호사스런 관념이며, 유엔은 그 관념의 증인처럼 과장된 몸짓을 보인다.

지자체는 어떤가? 춘천은 어떤가? 중도의 고인돌 위에 세워지는 레고랜드와 소양강처녀상 옆에 만들어지고 있는 스카이워크는 우리 시대의 화장과 분식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스카이워크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건너편 공원을 파헤쳐 주차장을 짓는 광경을 보면서 질소가스를 잔뜩 넣어 부풀려놓은 허니버터칩을 떠올리는 건 괜한 선병질일까? 정작 먹어보면 그저 느끼한 맛뿐인 ‘과자’같은 요란한 이벤트들 - 거기에 쏟아지는 관심과 집중, 과장과 허위가 무섭다.

하창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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