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최고 기온을 갱신하고 있는 요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폭염은 전기 누진세만큼 두렵기까지 하다. 이때 잠시 숨을 고를 만한 춘천의 피서지는 어디일까. 그 어느 곳보다 지암리를 먼저 꼽는 춘천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시원한 계곡을 품고 있어 여름에는 피서지로, 또 겨울에는 얼음낚시터로도 유명한 지암리. 그곳은 화악산 자락에 자리한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심창기(53) 씨를 만났다.

“화악산이 엄청 크고 골짜구니가 많아요. 집다리골 골짜기, 원평리 사직골이라는 골짜기, 오탄리쪽 골짜구니가 다 가평 북면까지 붙어있어요. 북면의 적목리가 마지막에 붙어 있지요. 사직골에는 바위에 구멍이 뻥뻥 뚫린 곳이 있어요. 사람이 인공적으로 그랬을 리도 없고 보면 아주 신기해요. 바위를 보려면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웬만한 사람은 건너가지도 못해요.”

마치 화악산을 손바닥에 놓은 듯 바위 하나하나 짚어내며 말로 화악산의 정경을 그려낸다. 산은 심창기 씨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심 씨의 아버지 심혁신 씨는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었다. 삼을 캐는 심마니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산을 많이 다녔어요. 열여덟에 삼도 하나 캐 보았지요. 기도를 하거나 삼 캐는 분들이 산엘 많이 다니지요.”

심 씨의 가족은 1974년 정부에서 화전을 일제히 정리할 때 지금의 지암리에 터를 마련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니며 경험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벌매라고 들어보셨나요? 산에 있는 토종벌을 잡아서 석청이나 목청을 따는 건데요. 싸리나무꽃이나 국화꽃이 필 때쯤 산에 올라가 소주잔이나 컵 같은 데다 꿀을 발라놓으면 벌이 날아와요. 벌이 날아오는 시간에 따라 빨리 오는 벌을 따라가다 보면 토종꿀이 있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토종꿀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단다. 토종꿀을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삼을 캐러 다녔다는 심 씨의 아버지 심혁신 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얘기가 궁금했다.

“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면 나뭇가지를 꺾거나 돌멩이 하나 굴리지 않아요.

산에 기대고 사는 사람들이 산에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심마니하면 ‘심봤다’고 외치는 이미지만 생각나는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심마니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짝을 지어 다녀요. 한 번 삼 캐러 들어가면 길게는 열흘씩 산을 헤매고 다니죠. 마음을 열어 서로 믿을 수 있는 사람끼리만 다녀요.”

삼을 발견해놓고 ‘심봤다’를 안하고 나중에 혼자 몰래 캘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오욕(五慾)이 이들 심마니들에서는 찾을 수 없단다.

“피붙이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죠.”

똑같이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들만 함께 다닌다는 심마니들은 동네에서도 한 몸 같이 정을 나누고 살았다고 한다.

오직 삼을 캐기 위해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 인삼을 채마밭에서 재배할 수 있게 됐고, 삼만 캐서는 크게 돈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 씨 역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약초나 꽃 이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산을 정기적으로 다니지는 않는다.
심 씨의 집 화단에는 하수오, 우슬, 벌나무 등이 즐비하다. 집 뒤안으로는 개복숭아며 돌배가 천지다. 산에 기대고 살지는 않지만 수혜를 받고 있음은 틀림없다.
 

“어인마니라고 하는 대장 심마니의 말에는 감히 거역을 못해요. 그만큼 심마니들은 자신들만의 철칙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잘 살진 못했어도 남에게 피해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사셨던 것 같아요.”

심 씨 아버지의 유산은 재물이 아니라 자연에 적응하는 방법과 사람을 대하는 방법인 것 같았다. 시골의 해는 빨리 졌다. 아버지와 화악산을 추억하는 심 씨의 이야기는 어둑해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폭염은 8월 말까지 쉬이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거란다. 그러나 시나브로 가을은 올 것이다. 그게 자연이기 때문이다.

김정운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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