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노래 속의 민중사 ④ 독립군가

‘역사는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역사는 좀 심했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삶은 많이 아팠다. 할아버지는 어떤 아픔을 겪었을까. 아프면 노래를 한다는데 아버지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부하들에게 어찌 해산하라고 말한단 말인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결했다. 1907년 8월 1일, 오전 9시 직전이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식’을 치루기 위해 모인 장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해산식에서 생길지 모를 소요에 대비한 일본군이었다. 2대대도 무기고를 탈취했다. 300여 명의 다른 부대원들도 합세했다. 남대문에서 서소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9시 30분, 일본군은 증원부대를 투입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이를 물리치고 10시부터 총공세를 펼쳤다. 일본군은 다시 증원부대를 보낸다. 그리고 숭례문(남대문) 위에 두 정의 기관포를 설치했다. 숭례문은 당시 서울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지금 시청앞 지하철역 9번 출구 쪽에 있는 병영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안타깝게 탄약마저 떨어졌다. 일본군 공병이 병영의 벽을 폭파했다. 11시 50분, 대한제국 마지막 군대, 정확한 명칭 ‘시위대’(侍衛隊)의 마지막 전투는 2시간 50분 만에 패배로 끝났다. 역사는 이를 ‘남대문 전투’라고 기록한다.

넉 달 전인 4월, 평양과 서울의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한다. 기독교 이념 중심의 비밀결사단체였다.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김구, 이시영, 김규식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공화정체의 근대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다. 우선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계몽운동 및 무장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독립문

한편, 남대문 전투에서 패배한 군인들은 의병이 됐다. 격렬한 의병투쟁이 전개됐다. 약 2년간 2천7백회의 전투에 14만명이 참가했다. 일본은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두 달간 2천명이 넘는 정규군을 투입했다. 남원을 시작으로 고흥, 광주, 영광, 남서해안과 무인도까지 뒤졌다. ‘남한대토벌작전’이었다. 많은 양민이 학살됐다. 조일(朝日)연합군이 ‘동학도 잔당색출’이라는 구실로 ‘농민학살’을 벌인 지 15년만이다. 이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주했다.

이듬해 경술년(1910년), 한반도는 일본령 조선이 됐다. 12월에 안명근(안중근의 사촌동생)이 독립군학교 설립자금을 모으다가 평양역에서 체포됐다(安岳事件). 일제는 이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가한 테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총독암살 미수사건’으로 조작했다. 1911년 초, 신민회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이 대거 투옥됐다. 600여명을 검거하고 105명을 기소한 ‘105인 사건’이다. 1심에서 105명 모두 유죄, 항소심에서 99명 무죄, 6명은 유죄였다. 40명에게 울릉도와 제주도로 유형이 내려졌다. 신민회는 와해됐다.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대해 들은 바 있는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만주로 건너가 4월(음력)에 봉천성 유하현 산 속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산업, 교육, 군사 중심의 병행독립운동을 주장,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한 달 후 이상룡은 옥수수 창고를 빌어 ‘신민회를 부흥한다’는 의미의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초대교장이 됐다. 독립군을 길러내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미 학생들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불렀다. 삼일운동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미국 군가인 <조지아를 행군하며>(Marching through Georgia>를 개사해 교가(校歌)로 불렀다. 후에 이 노래가 다시 개사돼 <독립군가>가 된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김진묵 (음악평론가)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