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보잘 것 없어도 사람을 만나면 아름답게 느껴지는 마을이 있다. 이런 마을에 가면 무엇보다 인심이 후하다. 어쩐지 그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들과 함께 살던 대가족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먹을 것, 입을 것 없어 힘들어도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밀조밀 흥부네 방 같은 옛 풍경은 찾을 수 없다. 춘천 남산면 ‘오양골’에 가면 그렇게 옛 시절이 생각난다.

오양골은 강촌에서 둥덜리강을 따라 백양리 방면으로 가다가 왼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마을이다. 물론 이곳에는 오양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래골’, ‘터일’ 등 꽤 많은 골짜기가 있다. 발래골은 ‘우레가 시작되는 골짜기’라서 발뢰(發雷)라고 쓰는데, 지금은 발래골 또는 발레골이라 한다. 평상시에는 그냥 둥덜리강을 보면서 걷기에 지나치는 골짜기들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냥 산다기보다는 치열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오양골은 백양3터널 밑을 빠져야 들어갈 수 있다. 옛 경춘선 열차가 요란스럽게 지나던 곳이다. 굴다리를 지나면 ‘여기도 마을이 있었네’라는 느낌을 받는다. 작은 골짜기에 물이 졸졸 흐르고, 언덕진 산비탈에 몇 채의 집이 있다. 그 집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우리와 같이 밥 먹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산다. 너무나 정겨운 풍경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 왼쪽으로 보면 아주 오래된 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오양골의 터줏대감 최연영(82), 김원정(82) 부부의 집이다. 오래된 집은 두 부부가 지은 집이다. 요즘은 그 집 옆에 콘크리트로 새로 집을 지어 머물고 있다. 집으로 들어섰더니 가장 먼저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에는 <동행>이라 쓴 시와 부부의 사진을 담아놓았다.
 

밧줄을 끌어당기며
강을 건넌다
아내와 함께 쪽배를 타고
장마철이면 함께 노저어
성난 물살을 달랜다

오솔길 가다 노래 부르면
마음이 환하게 피어
함께 들길에 꽃씨를 뿌린다

서로 흐르는 땀을 닦아주면
따뜻한 강물소리
가슴으로 흐르고
여덟 가지 고운 색 무지개
강여울에 물든다

부부가 살아온 이야기를 두어 시간 듣고 나자, 부부의 삶이 고스란히 시 속에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결혼 후 군에 갔던 남편이 사병 봉급을 아껴 쌀을 한 가마 사서 지게에 지고 집으로 들어올 때 정말 늠름했다고 회상했다. 자신을 아껴주던 시누이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슬프게 또 눈물을 흘렸다. 어려운 살림 서로 챙기며 살던 옛날을 이야기했다.

오양골(五陽谷)은 처음 이 골짜기에 다섯 집이 양지바른 곳에 들어와 살림을 시작하면서 마을이름이 됐다. 작은 골짜기지만 골짜기 끝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검봉산에 이를 수 있다. 오양골 안에는 곧은골(곧게 뻗은 모양), 지르내미(길게 뻗은 모양), 매차나무골(매차나무가 많음), 큰너머골(골짜기가 큼), 작은너머골(작은 모양) 등의 또 다른 작은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에는 당귀, 황기, 마, 작약, 시심 등의 약초가 많았고, 토종벌이 참 잘 됐다. 약초를 캐고, 나물을 뜯고, 벌을 쳐서 아이들을 모두 키웠다. 부부는 넉넉지 못한 살림 때문에 아이들 공부 시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했다.

시내와 가깝지 않은 탓에 아이들이 아프면 민간요법으로 치료했다. 배탈이 나면 가재를 잡아 삶은 물을 마시면 되고, 옻이 오르면 들기름을 바르고, 눈병이 나면 꿀물을 눈에 넣거나 삼잡이를 했다. ‘삼잡이’는 바람벽에 사람을 그려 눈가에다 바늘을 찌르고 눈에 난 삼이 삭아야 바늘을 빼준다고 하는 주술이다. 홍역이 걸리면 개똥물을 해서 먹였다.

인심 좋은 오양골에는 잔치도 많았다. 생일잔치, 환갑잔치 등등. 넉넉하지 않아도 부침개 하나라도 솥뚜껑에 부쳐서 나눠 먹는 화목한 마을공동체였다. 오양골에 가면 그 옛날 춘천사람들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이학주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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