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충복’ 아이히만이 한국 공무원에게 주는 교훈

베를린 서부 중심가 주택가 방향의 버스 정류장인 ‘Sylter Hotel(쥘터 호텔)’역에는 호텔의 입간판보다 훨씬 큼직한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부정적 의미로 기억해야 할 장소라는 뜻인 ‘MAHNORT’라고 독어로 쓴 것도 모자라 영어로 ‘NEVER FORGET’이라고 쓰여 있고, 한 남성의 사진이 붙어있다. 사진 속 남성의 재판을 지켜보던 저명한 심리학자들도 “그는 놀랍도록 정상적이고, 너무나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 그의 변론도 “월급을 받는 공직자이기에 상부의 지시를 따랐고, 그렇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했다. 재판장은 그에게 ‘학살죄’를 물었지만, 아이히만은 “단 한 명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고, 죽이라고 명령한 적도 없다. 남을 해치는 일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충성을 서약한 공직자로서 일했던 아이히만은 1961년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아이히만에 대한 안내판

도대체 이 남성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죽고 나서도 독일인들과 관광객들이 운집하는 베를린 중심지에 얼굴이 매달려 이처럼 비참함을 겪고 있는 것일까.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 mann)은 독일 나치정권 시절에 게슈타포(나치시절의 비밀경찰)와 나치친위대의 보안업무를 총괄한 제국안보본부(RSHA)를 이끌었는데, 그 사무실이 이 버스정류장 근처였다. 이곳의 주요업무는 유태인 이민문제였고, 1941년부터는 유태인 말살로 이어갔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이히만은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로서, 빠르고 효율적인 수송을 위해 열차의 배차간격 및 경유지를 체크하며 철도청과 각 지역 담당 경찰서와 함께 이송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600만명이 학살된 끔찍한 학살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행정절차, 업무처리, 명령수행, 공직자의 도리와 같은 것들이었다. “죄를 인정하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내가 관심 있는 일은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당시의 재판을 기억하는 이들도 아이히만은 정말로 자신의 죄를 모르는 듯했다며, 그가 지휘한 열차 안의 유태인을 인간이 아니라 짐으로 여기고 숫자 세기에만 몰두한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히틀러에게 월급을 받는, 무섭도록 성실한 관리였다. 악마처럼 생기거나 괴팍한 성격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단지 기계의 부속품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한 것이다. 자기가 사인한 문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앗아가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나치라는 조직 안에서 그는 위계질서에 따라 복종만을 했는데, 그것이 파시즘의 광기로 치닫고 최악의 전체주의를 만든 것이다. 누군가에게 급여를 받고 상부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라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뼈아픈 반성과 이웃국가들의 감시로 지금에야 히틀러와 나치는 악의 상징이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을 넘어 전 유럽을 호령하던 독일의 총통과 그의 세력들이었다. 히틀러 정책에 의심이나 반기를 드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에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 심리학자 Hannah Arendt(한나 아렌트)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5차 청문회 중에서 K스포츠재단의 노승일 부장은 최순실이 청와대 문건과 대통령 연설문 등을 받아본 사실을 증언했다. 이에 어느 의원이 ‘남(최순실)의 컴퓨터에서 몰래 문건을 복사한 일은 범죄’라고 하자, 노 부장은 “처벌 받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후에 그가 마지막 청문회에서 남긴 말은 “제가 용기를 냈던 것은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였다.

죄의 성격은 다르지만,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야하는 조직 안에서 노 부장과 아이히만의 대처는 달랐다. 한 사람은 생각을 했고, 한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복종과 근면의 태도로 일했다는 아이히만은 전 세계를 경악과 분노에 빠트렸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는 노 부장에게 사람들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성원을 보내고 있다.

아이히만의 의견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직접적으로 죽인 민간인은 없다’, ‘월급 받는 공직자는 지시를 어기면 안 된다’ 세 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겠다. 이것은 악의 상징인 나치일당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공직자들로부터도 반복적으로 들리는 말들이다. 히틀러나 아이히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돌연변이 악마가 아니었다. 그들을 선출시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도록 방관했다는 죄책감을 느낀 독일인들은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스스로를 감시했고, 뼈저린 사죄와 혹독한 외교적 괄시를 견디며 다시금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이제 대한민국에게 묻고 싶다. 한국에도 아이히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혼란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지금 정확히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정은비 시민기자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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