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청평사를 찾았다. 소양댐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인성병원 앞에서 탔던 것 같다. 배를 타고 한참 만에 청평사 선착장에 닿았다. 인파에 휩싸여 청평사로 향했는데, 무엇을 보았는지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배 시간에 맞추느라 손잡고 뛴 기억만 생생하다. 첫째 아이와 청평사로 향하는 배 안과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는 걸로 보아 몇 년 후에 또 갔었던 것 같다.

청평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 중의 하나가 폭포다. 폭포 앞은 늘 붐빈다. 예전 안내판은 ‘구성폭포’였다.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말에 눈을 감고 듣던 그때는 구성폭포에 정신을 빼앗겨 다른 폭포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이자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청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유산기를 따라 걷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폭포가 여러 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진 찍던 폭포 이름도 ‘구성’이 아니라 ‘구송(九松)’, 또는 ‘구송정(九松亭)’이었는데 와전됐다는 것을 안 것도 이때였다.

한동안 폭포가 두 개인 줄 알았다. 유산기도 대부분 두 폭포에 대해서만 언급했고, 문집 속에서 만난 한시도 그러했다. 서종화(徐宗華, 1700~1748)의 〈청평산기(淸平山記)〉에서 “식암(息庵)에서 잠시 쉰 후 다시 선동(仙洞)의 옛 터를 보기 위해 시내를 따라 수십 걸음 내려가니 이층 폭포가 보였다. 서쪽에 7층의 석대(石臺)가 있는데, 처음엔 누가 이렇게 솜씨 있는 것을 만들었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란 문장을 읽고 선동에 있는 ‘식암폭포’까지 알게 됐다.

다산 정약용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산은 청평사를 유람하고 경운대폭포, 구송정폭포, 와룡담폭포, 서천폭포에 대한 감흥을 시로 읊었던 것이다! 청평계곡은 폭포의 나라였다. 다산이 언급한 폭포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경운대폭포를 찾아 나섰다.

수없이 변해 고였다가 흐르나 百變渟流勢
근원은 한 줄기 샘일 뿐 由來一道泉
급히 흐를 땐 재촉한 듯 走時誰迫汝
머무를 땐 고요하여라 留處忽蕭然
서글픈 꽃은 함께 갔지만 怊悵花俱往
호걸다운 돌은 옮겨가질 않네 雄豪石不遷
청평산을 나가는 날에는 須知出山日
아득히 평평한 냇물 이루리 浩淼作平川


경운대폭포의 위치에 대해 두 의견이 있다. 구송폭포로 알려진 폭포를 경운대폭포로 보는 경우와 구송폭포 아래에 있는 폭포를 경운대폭포라 부르는 경우다.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다산은 구송폭포로 알려진 것을 와룡담폭포라 했다. 와룡담폭포를 용담폭포라 부르며 시를 남긴 사람도 여럿이다. 다산은 와룡담폭포 아래에 있는 것을 구송정폭포라 했고, 구송폭포란 제목의 시가 선인들의 문집 여기저기에 수록돼 있다.

청평사에 갈 때마다 계곡을 유심히 보며 경운대폭포를 찾았다. 서천폭포는 청평사 옆 서천에 있기 때문에 다산은 상류로 올라가며 지은 것이라 생각하고 구송정폭포 아래에 주목했다. 다산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시를 형상화했기 때문에 다시 꺼내 읽었다. 고였다가 흐르며 수없이 변하고, 급히 흐를 땐 재촉한 듯하며 머무를 땐 고요한 곳. 어디일까.

매표소를 통과하면 넓은 반석 사이로 물이 쏟아져 내달린다. 여기저기서 하얗게 부서진다. 떨어진다는 표현보다는 세차게 흐른다는 묘사가 어울린다. 한바탕 쏟아진 물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매표소와 연결된 거북휴게소 뒤 바위 사이로 사라진다. 이곳은 여름에 평상을 설치하고 탁족을 하며 시름을 잊는 곳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에 적합한 곳이다. 굽이친 물은 두 번 꺾어지며 떨어진 후 조그만 못에서 숨을 고른다. 매표소 위부터 휴게소 아래를 아우른 곳, 좁게는 휴게소 아래가 다산이 노래한 경운대폭포가 아닐까.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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