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잎을 모두 잃고 운동장엔 잔설이 하얀 겨울. 담임하고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방학 날.

해마다 그 날이면 으레 하게 마려인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서, “니네 방학하면 뭐 하고 싶니”하며 써 보라고 하니 아니나 다를까 한 아이가 무슨 재미있는 걸 썼는지 옆 아이들이 킬킬댄다. 궁금해서 보려고 가니 한 손으로는 자기가 쓴 걸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나를 못 오게 극구 밀어낸다. 그 상황이 궁금한지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이 죄다 그 아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내용을 확인한 후 킬킬 웃으며 나와 그 아이를 번갈아 본다. 할 수 없이 “보여주면 그네 타게 해 주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아이들의 앙탈은 끝난다.

일러스트=변갑성 시민기자

“방학하면 저는 게으름뱅이가 될 거예요. 왜냐하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쉬고 싶거든요.”

아이고, 이 녀석. 얼마나 쉬고 싶으면 안 그래도 푹 쉴 수 있는 방학에 아주 게으름뱅이가 되겠다고 할까. 아이가 또래들보다 공부가 늦는다 싶어 갓 입학해서부터 글자 공부, 숫자 공부를 내가 질질 끌다시피 몰아쳐 가르쳤는데 그게 녀석에겐 꽤나 힘들었나 보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따지듯 일부러 쓴 것 같다. 미안해하는 나를 보자 녀석도 너무했다 싶은지 봤으면 빨리 내 놓으라고 종합장을 뺏어간다.

싫은 공부 억지로 하다 떼가 나 연필 내던지고 집에 가겠다고 울기도 여러 번. 하는 짓마다 개구진 데다 친구들 미운 짓도 여러 번 해서 혼날 일도 부지기수. 집에 서는 부모님 말 안 듣는다고 혼나고 또 학교 오면 또 선생님 말 안 듣는다고 내게 혼나면서 아이는 용케 한 해를 잘 견뎠다.

나 역시 이 녀석과의 한 해는 길게 느껴졌다. 1학년이 다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비뚤배뚤한 글씨, 쥐 갉아먹은 옥수수처럼 빼먹은 어휘들을 보면 공부를 해도 한참 더 해야 할 것 같은데도, 녀석은 무슨 배짱인지 자기는 공부를 너무 많이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게으름뱅이가 되겠다고 한다. 아직 친구들에 비해 글씨가 좀 모자란 현실에도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해 온 노력의 당당함을 알고 있다. 여덟 살, 1학년을 보내면서 아이는 글씨를 배우는 일보다 더 힘든 걸 스스로 터득한 것 같다. 그 배포를 보니 어디가도 굶지는 않겠구나 싶다. 묘하게 안심이 되는, 좋은 징조다.

쉬는 시간. 아까 그 아이가 종합장을 다 썼으니 새로 달라고 한다. 새 종합장을 내어주면서 이름을 써 주려는데 아이가 황급히 외친다.

“선생님, 내 것에는 1학년이라고 쓰지 말구 2학년이라고 써요. 알겠죠?”

난 아이의 기발함에 놀라는 척하며 그렇게 써 준다.

“아, 맞아. 방학 끝나고 며칠만 더 오면 인제 2학년 되니깐 2학년이지.”

그걸 보고 있던 짝꿍 아이가 끼어든다.

“야, 니가 벌써 2학년이냐. 너 안즉 1학년인 주제에 2학년한테 까불라 그래. 싸가지 없게.”

그러자 그 아이도 지지 않는다.

“까불라 그러는 거 아니거든? 나 2학년 때도 이 종합장 계속 쓸 거니깐 그렇지!”

듣고 보니 아이 말이 맞다 생각했는지 아이들이 너도나도 종합장이며 학용품을 꺼내더니 내 책상 위 연필꽂이에서 펜을 꺼내다 ‘1학년’을 ‘2학년’으로 고쳐 쓴다. 아이들, 마음은 벌써 2학년에 데려다 놓았나보다. 묘하게 안심이 되는, 좋은 징조다.

점심시간. 메뉴로 나온 단호박 갈비찜을 평소보다 많다 싶게 받은 그 아이가 역시나 다 못 먹겠는지 다른 건 다 먹고 단호박 갈비찜만 남긴 채 맞은편에 앉은 내 쪽을 향해 목을 쭉 빼고 작게 속삭인다.

“선생님 저 호박 먹기 싫어요. 이거 좀 남길게요. 알겠죠?”

그러자 그 얘기를 듣던 옆 자리 아이가 또 퉁을 준다.

“으이구, 아주 자알 헌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욕심쟁이처럼 많이 받으래? 윤수가 다 먹고 나가니깐 너도 빨리 나가서 놀라구 뻥치는 거 다 알어. 선생님, 쟤 다 먹고 가라 그래요.”

그러자 그 아이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이 벌개져서 대든다.

“넌 상관 쓰지 마. 나 원래 호박 싫어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나를 향해 애원한다.

“선생님, 2학년 땐 다 먹을게요. 오늘만 좀 봐줘요. 진짜요. 네?”

2학년 땐 다 먹겠다는 말에 난 얼결에 난 또,

“알았어. 2학년 땐 다 먹을 거니깐.”

그러고는 그 아이의 식판에서 호박을 숟가락으로 떠서 내가 날름 먹는다. 그걸 지켜보던 옆 아이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퉁을 준다.

“으이구, 선생님이 자꾸 먹어 줘서 쟤 뻥치잖아요. 쟤가 2학년 때도 호박 안 먹으면 어쩔라구 그래요.”

그 말에 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주억거린다.

“ㅇㅇ이가 2학년 되면 다 먹을 거라 그러니깐….”

받아쓰기를 틀려도, 뺄셈 문제를 못 풀어도 아이들은 내게 와서 2학년 땐 잘 할 테니 한 번만 봐 달라고 한다. 내가 ‘2학년 땐 잘 하겠다’는 말만 하면 내가 껌벅 속아 넘어가 주는 걸 알고 아이들은 모든 일에 2학년이 되면 잘 하겠다고,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하라고 능청을 떤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부러 아이들 말을 완전히 믿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 맞어. 2학년 때에는 잘 한다 그랬지?”하며 들어준다. 그러면 옆에 있는 아이들이 영락없이 나를 타박한다. 선생님이 자꾸 봐 줘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 말이 나오면 난 이번에는 또 불안한 표정으로 엄살을 떤다.

“아이구, 그러다 니네가 2학년 때 잘 안 하면 선생님이 2학년 선생님한테 막 혼나겠네.”

그러면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단속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한다.

“야, 니네 2학년 되면 진짜루 잘 해. 안 그러면 우리 선생님이 욕먹으니깐.”

그러면 나머지 아이들도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2학년 땐 잘 해야 한다고 다짐하듯 말해준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이렇게 미래를 마음으로 준비한다. 그 분위기에서 난 아이들이 2학년을 맞이하면서 더 잘 커 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읽는다. 심지어 몇 아이는 나를 위로하기까지 한다.

“에이, 선생님이 믿어 보세요. 2학년 때는 잘 할 거니깐요.”

역시 묘하게 안심이 되는, 좋은 징조다.

그 날의 마지막 시간. 점점이 모여 앉아 공기를 하고 노는 아이들에게 통지표를 나눠 줄 테니 자리에 앉으라고 했더니 통지표가 뭐냐고 묻는다. “한 해 동안 니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선생님이 종이에 다 적어놓았으니 이걸 너네 부모님께 갖다 보여드리는 거다”라고 말하니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럼, 그걸 뭐 하러 자리에 앉아서 받아요. 그냥 지금 줘요. 계속 놀게요” 그런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 말도 맞는 것 같아 일일이 다니며 한 명씩 통지표를 나눠줬더니 슬쩍 보고는 옆에 놓은 채 계속 논다. 그러고 보니 통지표는 교사와 학부모에게만 중요한 것인가 보다. 통지표를 나눠 주고 이제 본격적으로 아이들과 마지막 날의 소감을 나누려고 자리에 앉으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선생님, 오늘 방학하는 날이잖아요. 그러니깐 자리에 앉지 말고 나가서 놀아요. 우리 그동안 공부 너무 많이 했잖아요” 그런다. 그 말에 다른 아이들도 일제히 문 쪽으로 달려가 줄을 선다. 결국 난 아이들과 방학 인사말을 나누는 대신 나가서 놀기로 한다. 아이들은 생쥐처럼 교실을 빠져나가 요즘 새롭게 발견한 놀이감인 자전거 거치대에 몰려가서 매달리고 올라타며 논다. 난 너희들과 방학 날의 서정을 진지하게 나누고 싶었는데, 으이구. 그러고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하려던 말들이 ‘방학 동안 건강해라’, ‘니네들이랑 지내면서 행복했다’ 뭐 이런 얘기였으니…. 아이들 말처럼 역시 좋은 징조에 맡겨야 할 모양이다.

송주현 (49·신북읍, 오동초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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