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먹어 가는데 취업을 하지 못해 걱정이다. 일간지 구인란을 펴놓고 일자리를 찾아봤다. 조건이 너무 좋으면 미심쩍고, 조건이 너무 나쁘면 못할 일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걱정거리만 사채 이자마냥 늘어간다. 이대로 나이가 든다면? 끔찍하거나 혹은 비참하거나. 라디오를 틀었다. 내일 날씨가 흘러나왔다. “고기압이 올라와 내일 하루도 쾌청한 날씨를 보이겠습니다.” 채널을 돌리자 캐스터는 시원한 목소리로 교통정보를 읊었다. 차가 아무리 막힌들, 날씨가 얼마나 죽여주든 간에 나는 이력서를 꺼내 들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이력서. 마땅한 이력이 없는 나에게 한 장의 이력서가 운동장보다 넓었다. 텅 빈 운동장 위로 하나둘 모여 운동회가 열리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다. 우주선 한 척이 내려와 지구의 인류와 동식물들을 싣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가는 곳에 휩쓸려 우주선 입구로 향하는 길고 긴 줄에 서 있었다. 줄이라기보다는 뭉텅이로 뭉쳐있는 덩어리였다. 인간 뭉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저 앞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문이, 우주선에 타려면 이력서를 본다고 한다. 제기랄. 세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소용도 없는 이력서를 들고 죽는 것인가. 나중에 내가 공룡처럼 화석이 된다면? 언젠가 박물관에 전시될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밑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별 볼 일 없는 이력서를 가진 인간’이라고 적힐 것이다. 죽기 전에는 다른 사람 이력서로 바꿔 들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꾸역꾸역 한 발자국씩 나가다가 어느 순간 두 발자국씩 밀리곤 했다. 다른 사람 손에 쥐어진 이력서를 슬그머니 훔쳐봤다.

일러스트=변갑성 시민기자

몇 달인지 몇 년인지 모를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날짜 세기를 포기한 지는 오래됐다. 저 멀리 점 같은 우주선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주선인지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우주선 입구 쪽에 다다랐다고 한다. 그동안 있었던 일은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였다. 때로는 역겹고, 대부분 지겹고, 떠올려보면 끔찍함의 연속이었다. 연옥이 있다면 분명 그곳에도 입구까지 이어진 줄이 있을 것이다. 간간이 누가 우주선 승선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승선하는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근거 없는 얘기도 나눴다. 나도 열심히 귀동냥했지만 대부분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뿐이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선택될 만큼 대단한 사람만이 우주선에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점점 회의가 들었지만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우주선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다.

까만 점같이 보였던 우주선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위용에 압도됐다. 저곳이면 우주 어디든지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우주가 멸망해도 우주선은 안전할 것처럼 보였다. 우주선에 비해 입구는 매우 좁았다. 입구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우주인 몇이 지키고 서 있었다. 입구 옆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냉정한 얼굴의 우주인이 앉아 있었다. 우주인은 인간이 건넨 서류 뭉치를 펼쳐 대면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발가벗은 인간을 심판하는 심판자 같았다.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침이 꼴깍 넘어가면서 심장이 요동쳤다. 이제 곧 내 차례가 다가오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우주선 입구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거절당한 사람들은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우주선 근처에서 또 다른 줄을 만들었다. 그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우주인 앞에 섰다. “인상적인 이력서는 아니군요. 수많은 인류 중에서 당신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뭐죠? 이력서만 보면 당신은 특별한 능력이나 장기도 없고, 저희가 스캔한 바로는 신체나 두뇌가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인류의 유전자 보존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 우주인이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저는 분명 보통의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크게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분명 어디선가 쓸모가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꼭 살고 싶습니다. 여기에 남아서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회사원이 말했다. 다른 인간들도 각자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회사원과 비슷하게 말했다. 살고 싶다는 것. 여기에 서 있는 군중 모두의 바람이었다. 회사원은 사회에서 갈고 닦은, 한없이 비굴해 보이는 얼굴을 우주인에게 펼쳐 보였다. 우주인은 인간의 비굴해 보이는 얼굴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저는 못 타더라도 제 아내만이라도 꼭 부탁드립니다. 제 아내의 배에는 아기가 있습니다.” 회사원은 동정심에 호소했다. “그런 사정이라면 여기 당신 뒤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을 특별히 대우할 이유가 없군요.” 우주인은 냉정했고, 회사원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그때 내 옆의 사람이 나를 밀치고 앞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밀치면서 맨 앞으로 나갔다. “저는 한국의 일류대학교를 나왔습니다. 저를 우주선에 태우는 게 인류를 위한 선택입니다.” 그는 꽤나 당당하게 말했다. 저 정도 자신감이라면 우주선에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주인은 답답한 듯이 말했다. “일류대학교가 어느 대학교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미 앞선 사람 중에는 하버드도 있고, 옥스퍼드도 있고, 도쿄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일류대학교를 졸업한 정도로는 우주선에 탈 충분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지구가 망하는 일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자신감 넘치던 엘리트는 우주인의 일침에 얼굴이 벌게졌다.

심판자 우주인은 스피커를 통해 모두에게 말했다. “혹시 이 중에 화가나 시인 같은 예술가는 없습니까?” 군중이 술렁였다. 그런 아무 효율 없는 종류의 인간을 뭐 하러 찾느냐는 비아냥이 들려왔다. 우주인은 비아냥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인류의 문화와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하지만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서 하나둘 굶어 죽어 나간 지 오래였다. 그래도 살아남았던 끈질긴 이들은 세상의 지탄을 받으며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때 어느 구석에서 대중을 비집고 나오는 이가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머리숱은 적었지만 눈은 매섭게 빛났다. “나는 철학과 교수요. 나는 미학에 대한 논문도 여러 편 썼다오. 철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항상 탐구하니, 이보다 더 인류를 위한 지식은 없소.” 그러자 우주인은 이제는 지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구에 철학자가 남아 있었다면 지구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구에서 철학을 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를 한다는 사람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조직의 관료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 자그마한 울타리 안에서 전제군주 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철학과 교수라고요? 차라리 광폭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들리는군요.” 우주인은 말을 이어갔다. “삶에서 철학을 구현하지 못하는데 어찌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군중은 조롱당한 철학과 교수를 향해 비웃음과 야유를 보냈다. “손으로 농사짓는 농부는 없습니까? 인류의 철학적 지혜를 위해서는 차라리 농부가 필요합니다.” 우주인이 재차 찾았지만, 기계와 로봇으로 식품을 만들어내는 요즘 시대에 농부도 사라진 지 오래됐다.

이런저런 꼴을 보다가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내 앞에서 벌써 대단한 사람들이 전부 거절당하는 것을 본 나는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내 이력서에는 내세울 만한 경력이나 자격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인은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내게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말했다. “우주선에 타고 싶습니다.” “이유가 뭐죠?” “죽기 싫습니다. 삶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이유를 가진 인간들이 너무도 많군요. 엄밀히 말하면 당신들은 우주 먼지나 다름없습니다. 우주 먼지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주 먼지를 굳이 이곳 지구에서 구할 필요는 없겠죠.” 우주인은 서류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졸지에 나는 우주 먼지가 되었다. 나는 가슴속에서 뭔가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당신들은 왜 이곳에 와서, 이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한답시고 이렇게 모멸감을 주고 심판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우리를 살릴 수는 있겠지만 심판할 권리는 없소.” 내 입에서 억울하고 답답한 무엇이 터져 나왔다. 우주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드디어 질문이라는 것을 하는 인간이 나왔군요. 다른 인간들은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림짐작만 하고 잘 보이기만을 바라더군요. 우리가 찾고 있던 인간 중 하나는 질문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왜’라는 호기심과 의구심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입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우주선에 탈 자격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군요. 우주선에 타십시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나는 기쁘면서도 떨떠름했다. 우주선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안은 컴컴한 터널처럼 보였다.

불현듯 잠에서 깼다. 이력서가 까맣게 젖어 있었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환희의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딱딱하게 굳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차라리 어느 날 아침에, 나는 먼지가 되어 있을까, 희망해 본다.

반정환 (32·신북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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