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의 탄핵소식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뉴스거리였다. 세계 곳곳에서 우익 성향의 대통령과 총리후보들이 선전하며 인종갈등의 우려가 가시화되고 평화인식에 대한 재정비가 절실해지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루어낸 민주주의 회복은 평화를 추구하는 세계인들에게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김서경·김운성 조각가 부부와 함께 소녀상 앞에서

최대 20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만들어낸 촛불 파도타기 장관과 다양한 예술이 함께한 축제의 장과도 같았던 집회의 시각적인 면모에 압도되었던 이들과, 폭력사태나 부상자도 없고 뒷정리마저 완벽했던 촛불집회의 선진성에 놀란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고작 한 정권 안에서 국민들이 광장으로 뛰어나오게 한 스캔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이었다. 비선실세, 국가기밀 유출, 예술인 블랙리스트, 뇌물수수, 국고의 사유화, 국가재난 시의 무책임한 대처 등의 말은 독일인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생소하게 들렸던 말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타결 논란’에 관한 내용이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은 ‘불쌍한’ 일본에게 한국은 무엇을 더 원하는가?”

미리 밝혀두지만, 독일은 전범국임을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가적, 기업적, 민간적으로 사죄하고 있으며, 물리적인 배상은 물론,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역사교육을 후손들에게 철저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 내에도 유태인수용소와 추모비를 건립하고 이를 관리하고 있으며, 100세에 가까운 고령의 나치 부역자들을 아직도 색출해서 처벌하고 있다. 현재는 전쟁난민을 받아들이는 등 세계평화에 대해 각별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국가가 독일이므로 이들의 역사의식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독일은 왜 같은 전범국인 일본에게는 같은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주로 독일역사와 유럽역사에 대해 배운다. 한국인도 전반적인 세계역사를 배우기는 하지만, 한국역사와 주변 아시아국에 대한 역사를 더 깊이 배우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갖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의 악명은 학창시절의 역사교과서보다는 할리우드 영화나 미디어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을 다룬 영화나 관련 작품은 현저히 적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외교와 협상에 능한 일본이 강조하는 ‘히로시마 원자폭탄’만 공공연하게 아는 것이다. 그런 불쌍한 일본과 한국 사이에 ‘일본군 위안부 협상타결 논란’이 있다니 독일인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기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평화의 소녀상’은 국내에서도 숱하게 철거압박을 받고 있다. 2015년 12월 28일에 소녀상 철거를 전제로 돈을 받았다는 비난이 일자 “사실과 다른 보도 자제를 부탁한다”고 했던 박근혜 정부의 입장표명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소녀상 철거를 압박하는 일본정부의 당당함은 끝을 모르고 있다. 개정된 국정교과서에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말과 자료사진들이 빠지고, ‘일본군에게 고통 받았다’라는 말만 남았다. 그 고통이 어떤 종류의 고통인지 알 길이 없다. 과오를 숨기려는 일본의 노력에도 국내사정이 이러한데, 우리 한국인은 ‘불쌍한 일본’이라고 부르는 독일만 탓할 것인가.

독일인 라파엘 켐켄(23·대학생) 씨 또한 일본군 성노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최근 그는 전쟁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즘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여했을 정도의 열정도 있지만, 그가 일본군 성노예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된 계기는 유럽 내 첫 ‘평화의 소녀상’이 독일에 세워졌을 때다. 소녀상의 작가 간담회에 참석한 켐켄 씨는 “전쟁이 70년이 지나도록 공식 사과가 없는 일본도 놀랍지만, 그런 일본이 외교적인 불이익 없이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국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며, 유럽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독일인으로서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동석한 그의 독일인 친구도 동감하며 “유럽에는 역사수업이 있는데, 아시아에는 역사수업이 없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백 마디의 말을 전하는 것보다 하나의 소녀상을 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겠다고 말했다. 한국인 친구에게도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예술성까지 가미된 평화의 소녀상을 한 번 보는 것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녀상의 작가인 김서경 조각가가 참담한 사건에 영혼을 담아 작업하며 여성 예술가로서도 괴로웠음을 켐켄 씨에게 통역해주자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며 자신이 일본인은 아니지만 전범국가의 후손인 독일인으로서도 다시금 반성하게 하는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덧붙여 “역사를 왜곡하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소녀상을 철거하고 싶을 것 같다”고 했다.

전쟁의 처참한 실상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한국의 강인한 여성들의 용기를 전쟁을 겪은 모든 국가의 여성들이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할머니들은 아픈 육신을 내보여 동정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 노출된 성 유린과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주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려는 것이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꽃보다도 고운 소녀들이 모진 일을 겪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서 어렵게 용기 낸 할머니들께 두 번 시련을 안겼다. 하지만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고 부러워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부패정권에 분노해서 시작한 집회 안에서도 예술과 평화를 추구할 줄 아는 우리 대한민국이 ‘평화의 소녀상’을 좀 더 사랑해준다면 백 마디의 말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보다 더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을까.

이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나 내 누이의 얼굴을 하고 있을 소녀상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과 싸우려고 세상에 나온 작품이 아니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함께 평화로운 미래를 그리고 싶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한국인들은 소녀상을 좀 더 사랑해달라”고 독일인이 말하고 있다. 그가 염려하지 않아도 우리 한국인들은 소녀상을 많이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정은비 시민기자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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